형세 기괴한 산을 만나 이름 물으니
이몽룡같이 귀골풍인 산방산 가까이에 방자처럼 제멋대로 생긴 바굼지오름이 단산이다.
바굼지오름 또는 박쥐오름 혹은 단산이라 불리는 이 오름은 산방산 옆에 위치한 기묘하게 생긴 바위산이다.
맨 처음, 추사 적소에서 대정향교를 찾아가는 중에 옆을 따르는 형세 기괴한 산을 만나 이름을 물어봤다.
중앙의 봉우리가 박쥐 머리. 좌우 봉우리가 거대한 날개를 편 박쥐 모습을 연상케 해서 박쥐오름.
일대가 바닷물에 잠겼던 예전, 이 오름이 바구니만큼 보였대서 바굼지오름,
바굼지는 제주어로 ‘바구니’란다.
조선시대 이르러 ‘대광주리 단’을 붙여 단산(簞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주 오름이 대개 봉긋 솟은 얌전한 봉우리 형태인데 반해 유독 특이한 모양새다.
봉우리가 셋인데 중앙의 봉우리는 가장 낮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중앙보다 높은 묘한 산세.
방향에 따라 바라보는 각도마다 모습 제각각 별나게 달라서 애초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나지막한 산이라 만만히 여기고 올라갔다가 간편화 차림으론 위험하다 싶어 도중에 뒤돌아섰던 적이 있다.
산행 소요시간은 한 시간 남짓, 비교적 수월할 거라 여겼는데 암석으로 구성된 산길 생각보다 가팔랐다.
한번 눈에 삼삼 아로새겨진 곳, 이번엔 정상까지 오르리라 벼르고 물과 간식이 든 배낭을 멘 다음 등산화 조여신었다.
단산사 오른 편이나 뒤편으로도 오를 수 있는데 전처럼 단산사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오름에 올랐다.
초입 얼마간은 마른 풀 서걱대는 오솔길이나 숲 사잇길 지나면 이내 나타나는 앙바튼 바윗길.
이마 위 바위에 밧줄 타고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다.
오래전 남해 사량도 옥녀봉 오름길처럼 가파른 공룡 능선 두드러지진 않은 등산로이지만 시작부터 험한 암벽은 위압적이다.
로프가 드리워져는 있으나 그렇다고 오르기 겁날 만큼 경사도가 심하진 않다.
현무암이 통상 그렇듯 표면 자체가 까칠까칠해 미끄럽지는 않아서 살살 오를만하다.
이 코스만 지나면 첫 전망대에 닿으므로 폐타이어 층계 둘 딛고 올라서면 넓은 대정 들판과 모슬봉, 사계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즈넉이 바다를 바라보며 풀섶에 앉아있는 청춘들은 뒷모습도 풋풋하다.
잠시 호흡 고른 다음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바위 틈새 길이 나오다가 새소리 청량한 솔숲길, 잡목 어우러진 오솔길, 어두컴컴한 대숲길도 지나게 된다.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다시 벼랑길이 두어 곳,
조심조심 로프에 의지해 비탈진 급경사 구간을 네 발로 기어오르다시피 한다.
서남부 지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360도 파노라마 뷰를 선사해 주는 정상부에 비로소 닿게 된다.
와우~~속이 뻥 뚫리게 호쾌한 조망권 일품이다.
동으로는 눈높이 같아진 산방산, 서로는 모슬봉, 남으로는 형제섬과 송악산,
북으로는 대정마을 저 멀리 군락 이룬 뭇 오름들까지.
용머리해안, 알뜨르 비행장도 알뜰살뜰 보여준다.
날씨가 받쳐주는 날 정상에 서면 마라도와 가파도가 선명히 보이고 한라산 자태 또렷 보이고도 남으리라.
정상부에서 더 이상 곁길은 나있지 않았다.
모슬봉 꼭대기에 걸렸던 해도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전면에 설치된 안내판 사진을 실제와 일일이 대조해 본 뒤 하나씩 도장 찍듯 사진에 담아뒀다.
대정 들녘 마늘밭, 양배추밭, 무밭, 브로콜리밭, 유채밭, 각각의 밭자리마다 색도가 달라 동색 계열로 꾸민 조각보 같았다.
추사 김정희가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했던 대정읍 안성리 적소와 단산은 매우 가깝다.
더구나 유생들 가르치던 향교 오가려면 들판 너머로 계속 건너다 보이는 단산이다.
김정희의 추사체와 단산과의 관련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추사체의 특징은 아주 독특해 법도에 구속받지 않으며 서체를 자유자재 넘나들면서 자유분방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단아한 미가 아니라 파격적인 아름다움이며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을 넘어 오래된 등나무 넝쿨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는 무심한 서체다.
졸박청고(拙樸淸高)는 필체가 서투른 듯하면서도(拙) 투박하고(樸), 맑고(淸) 고아하다(高)는 의미다.
대교약졸(大巧若拙), 가장 정교한 것은 도리어 서툴게 보인다는 경지로 김정희가 완성한 추사체의 예술적 특징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추사체의 산실이 된 대정마을 사람들은 “추사의 글씨체가 바로 이 박쥐오름의 모양새를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8년 3개월의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후인 만년, 추사 글씨는 구성미가 조화롭고 획의 흐름에 리듬감이 실려 있는 등 파격미와 개성미를 보여주고 있다.
바굼지오름 그 단산의 동쪽 능선인 뾰족한 돌산은 완전 수직 절벽길로 진입금지 구간이다.
탐방로를 벗어나면 곧장 낭떠러지 벼랑이다.
그럼에도 위험 무릅쓰고 함부로 모험에 도전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하나, 록클라이밍 연습장일 정도로 암벽 날카로워 보기만 해도 아찔한 산세다.
이제 다시 온 길 되짚어 천천히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가벼이 하산로로 뒤돌아서 걷기 시작하자 보금자리에 깃든 까마귀가 까악깍댔다.
가쁜 숨 몰아쉬며 오를 때보다 내려가기는 수월해 금방 단산사였다.
이렇듯 오가는 데 한 시간 정도면 가능한 산행지 단산과 산뜻하게 작별을 고한다.
대정고을 향해 벌판길 걷는데 건너편 숲에 어린 금빛 노을이 고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