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과 혼인지 신화를 따라

by 무량화

모든 세기의 문화권마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 오는 고유의 신화가 있다.


이 같은 신화는 민족의 신념이며 그들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라 풀이된다.


신화를 종교처럼 진지하게 경배하는 사람도 있긴 하나 건국신화는 자기 뿌리에 대한 예우상 신뢰하는 정도이지 싶다.


다 알다시피 과학이나 세상의 이치에 대입해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구전돼 내려오는 동안 민족의 서사시로 자리매김된 신화.


신화에 나오는 인물은 거개가 신적인 존재다.


나라마다 건국신화가 있고 신화에 가까운 영웅담도 있으며 이에는 신성성과 위엄성이 부여돼 있는 데다 저마다 초자연적 능력을 갖췄다.


환웅과 웅녀에서 비롯된 단군 신화에서부터 그리스 로마의 신화까지 우리는 많은 신화를 들어 알고 있다.


제주에도 역시 외딴섬이라는 특수성에 따른 나름의 신화가 있다.


탐라국 이름을 가진 옛 제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구름과 바다만이 아득하게 펼쳐진 섬의 중심에 선 한라산이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에 三神人을 동시에 탄강시켰다.


지금으로부터 물경 사천삼백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제주도의 시조 격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의 탄생신화가 서린 곳이 삼성혈이다.


탐라개벽신화의 발상지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인 이곳은 사적 제134호다.


세 신선이 태어난 모흥혈(毛興穴)을 삼성혈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땅에 나있는 세 개의 구멍은 그대로이다.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와도 쌓이지 않고 비가 억수같이 내려도 빗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인근에 숲을 이룬 수백 년생 고목들도 모두 한결같이 혈을 향하여 감싸 안듯 가지를 벌렸으며 공손히 고개 숙였다고.


건시문(乾始門)/입구의 홍살문/ 삼성전(三聖殿)
정자인 모성각과 경내 울창한 숲
삼성문 앞 분향소와 전사청
제주도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가 태어난 삼성혈과 경내 비석


어제 성산포 다녀오다 혼인지를 들른 터라 오늘은 제주시에 나간 김에 볼일을 마치고 나서 삼성혈을 찾았다.

문 닫을 시각에 촉박해서야 겨우 닿았는데 그나마 급히 서둘지 않았으면 허탕 칠 뻔했다.

전시관과 영상실 방문은 못했지만 숲 어둑신한 대로 경내 한바퀴 빙 둘러는 보았다.

마당에서 투호놀이를 할 수 있는 전사청 방 안에서 학생 셋이 둘러앉아 탁, 탁 소리도 선명하게 장기를 두고 있었다.

스무 살 무렵 여름방학에 클래스 메이트가 사는 제주도에 갔을 때 친구 숙이네 집 바로 이웃이었던 삼성혈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담장은커녕 울타리도 없는 민둥한 언덕배기로 저녁 먹고 슬슬 걸어 다니곤 했다.

삼성혈로 들어오는 건시문도, 그 앞의 홍살문이나 삼성전도 숭모당도 전혀 없는 아주 밋밋한 장소였는데.

그때 숙이가 여긴 사적으로 지정된 중요한 장소라던 곳, 허나 삼성혈이라 쓰인 작은 팻말 외엔 단청 바랜 채 쓰러질 듯 낡은 집 한 채뿐이었다.

작은 굴 비슷한 흔적은 거기서 제주도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가 태어났던 곳이라고 친구는 말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

가락국 시조처럼 알에서도 아니고 왜 하필 요상하게 땅굴 속에서 태어났담, 하면서 농을 했던 기억도 났다.

뒤늦게나마 도심 안의 녹지공간을 공원처럼 아름차게 조성해 놓아 보기도 좋은 데다 신화를 토대 삼아 역사기록대로 잘 복원된 건물도 볼만했다.

돌담장 높직이 둘러싼 삼성혈은 담벼락에 바짝 관람대를 만들어 놓아 거길 올라가면 분화구 닮은 곳에 삼각 꼭짓점에 하나씩 난 구멍이 보였다.

아직도 매년 12월 10일에는 삼을 나의 탐라개벽을 기리는 대제가 제주도민제로 열린다는데 오늘도 삼성문 앞에선 향불 사루고 있었다.

오십여 년이 지나서 다시 가본 이 동네, 귤나무가 있고 돌 우물물 차디차던 제주시 이도 일동 친구집 터 짬에는 칼호텔이 떡하니 서있었다.



성산포 가는 길목 도로변에서 유독 혼인지라는 곳이 눈길을 끈다.

제주 고씨, 양씨, 부씨가 우마와 오곡 종자를 가지고 온 세 공주와 혼인을 하고 신방을 꾸몄던 장소란다.

이곳 역시 다른 볼일을 마치고 저물녘에 귀가하다가 차에서 내려 다시금 들렀다.

큰길에서 머지않기에 노을빛을 안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누가 구경 올까 싶었는데 의외로 대학생 동아리 팀과 올레길을 걷는 몇 사람이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먼나무 빨간 열매 더욱 붉고 토종동백 단정히 피어나는 곁에 애기동백 꽃잎 하염없이 흩날렸다.


어느새 수선화도 연연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인기척에 새삼 느긋해져 안내도 앞에 잠시 섰다.

주르르 읽어 내린 설명문에 따르면 내용은 이러하다.

탐라국을 개국한 세 신인이 가죽옷을 입고 수렵생활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세 신인들이 한라산을 단숨에 내달려 동으로 가 목함을 열자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玉函)이 있었다.

옥함을 연즉 청의(靑衣)를 입은 자색 출중한 공주 세 사람이 단정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이는 틀림없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선물이다” 하며 세 신인은 무척 기뻐하였다.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세 공주는 그 아버지인 왕이 서쪽 바다를 바라보다가 상서로운 빛 영롱한 명산에 三神人이 강림하는 걸 봤다고.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그들에게는 배필이 없음으로 세 공주를 보내 예식 갖추고 대업 이루도록 하라는 명을 세 쌍의 남녀는 그대로 따랐다.

목욕재계 후 하늘에 고하고 각기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부부가 되니 비로소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혼인지(婚姻池)라 하며 신방 꾸몄던 굴을 신방굴이라 부르는데 하나의 동굴 같으나 곁가지 친 세 개의 굴로 남아 있다.

세 쌍의 부부가 각각 정주할 생활터를 마련해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였다.

그렇게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 이뤄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닦았다고.

이후 수천 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하다가 고려 시대에 합병이 되었다는데 제주 삼성혈의 신화는 실제로 역사와도 엮여 있다.

1526년 제주목사 이수동이 고·양·부 씨의 후손들에게 제를 지내게 하였으며 1827년 전사청을, 1849년 숭보당을 세웠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신화와 전설 따라 삼천리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