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아침.
환기를 시키려고 앞뒷문 활짝 열어제키니 한라산 봉우리가 하이얗다.
설문대할망 풀어헤친 머릿단 뒤로 넘기고 잠자듯 누운 프로필 쓰다듬어 볼 만큼 아주 선연하다.
턱선 쪽은 영실이겠고 붉은 입술과 두툼한 코는 남벽분기점에서 올려다본 백록담 바위군, 꾹 닫은 눈매 지나 시원스런 이마 뒤로 넘긴 은발은 성판악에서 정상 올라가는 코스.
아리따운 비너스처럼 젊은 여인이라면 정복욕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련만 탐심 그만 수굿해진다.
제주섬을 만든 어머어마하게 몸집 거대한 할망 신이라서다.
망망대해에 뜬 일엽편주 같은 섬이란 입지가 뭇 신을 만들어 내, 제주에는 무려 1만 8천 위(位)의 신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높게 받드는 엄지신이 설문대할망이다.
한국은 고래부터 창조신으로 성스런 어머니를 모신(母神)으로 섬기는 신심이 깃들었던가.
하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모계적 요소가 강했다니.
그래서인지 노고(老姑) 할미가 영영 세세 지키는 산, 지리산 모든 봉우리와 골을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성모인 마고할미 신화가 생겨났다.
지리산에는 3대 주봉 중 하나인 노고단이 있다.
천왕봉, 반야봉과 달리 어이해 봉 대신 단?
신라시대부터 노고할미에게 국태민안을 비손 하며 제단을 쌓았던 봉우리라서 노고단이다.
지금은 노고운해,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새벽녘 구름바다가 장관 이룬 노고단이다.
이상스레 그 고노할미는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아니라서 친근감이 드는데 반해 설문대할망은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그래서인지 살갑지는 않다.
아마도 육지와 다른 섬이란 환경이 그녀를 두려운 인물로 만든 건 아닐지.
신격화시킨 사람이니 그녀 또한 환경의 지배를 받는지라 삶의 방식과 행동거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으리.
살아오면서 환경이 한 인간의 인격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는 바로 나 자신이 그 근거다.
엄격하신 할아버지로부터 조신하고 참하다는 소릴 들으며 자랐고 학창 시절 조용한 문학소녀였는데 떠들썩해지고 수다스러워진 지금의 난?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가장 중요한 선택을 서툴게 한 어리석은 내 탓이요! 인 것을.
엉뚱스레 서두가 삼천포로 빠져 고해서가 될뻔했다.
각설하고, 봄처럼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다.
오후 약속이 없다면 눈 쌓인 영실로 올라가 윗세오름이나 존자암 눈밭을 즐기련만.
중앙로터리에서 가까운 치유의 숲 서오름을 가려고 625번 버스를 기다렸다.
아직 8분 남은 시간을 이용, 바로 앞 이삭토스트 가게에 가서 간단한 브런치용 음식을 주문했다.
계산부터 하고 기다렸으나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
토스트 굽는 손길과 로터리로 들어오는 버스 사이로 오가는 시선.
포장이 거의 다 되어갈 즈음 버스가 오는 걸 보자마자 이따가 들러서 찾아갈게요, 외치고는 차를 탔다.
배차시간이 한 시간 여나 될 만큼 무척 뜨는 노선이라 어쩔 수 없었다.
동홍동을 지나 헬스케어타운에 접어들면 매번 ㅉㅉ, 중국 자본을 끌어들인 졸속행정의 표본을 보며 끌탕한다.
무개념에 가까운 주무처의 무계획한 도시개발 현장을 한참 지나쳐야 하기 때문이다.
서귀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한라 산록 방대한 터에 짓다 만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서있는 게 마치 르와르물 영화 촬영장 같다.
외면하려야 할 수도 없는 것이 사방 천지 좌우로 동홍동과 토평동을 아우르는 규모 거창한 건물들이 휑하니 들어차 있으므로 그 단지를 벗어나려면 노선버스 서너 코스나 지나야 한다.
여기서 밝은 양 에너지를 다수 빼앗겨 서오름까지는 무리겠다 싶어진다.
솔오름 입구에서 얼른 차를 버린다.
서귀포 원도심 주민들의 아침 산책지이기도 한 곳.
솔오름은 한자로 쌀미(米) 자를 써서 미악산으로도 불린다.
올 적마다 일기 별로인 날씨라(그런 날은 먼데로 뛸 수 없어 아쉬운 대로 찾게 되기에) 한라산 웅자를 옳게 배알 하지 못했는데 이번만은 틀림없을 터다.
제주어로 쌀은 솔, 그래서 미악산은 쌀미(米)를 쓴다지만 내겐 여전 소나무 송(松)이 들어가는 솔오름.
상긋한 솔향기 솔솔 나는 솔오름 초입, 거개가 그러하듯 출입구 구조는 마소 드나들기 상그럽도록 튼튼한 목재로 만든 ㄹ자 형태다.
입구 바로 앞에 동네 공원마다 갖춰진 운동시설도 몇몇 개 설치됐으며 삼나무 그늘 아래 평상자리도 여럿 놓여있다.
일별하고 곧장 산행으로 들어간다.
삼나무 숲 지나면 잡목숲 잠시, 양지바른 흙길 걷다 보면 계단길 이어지며 다시 쭉쭉 일렬로 도열한 삼나무들이 기다린다.
흙길 옆에는 양치식물 푸르고 덩굴식물인 망개열매 까치밥 열매 곱다랗게 익어간다.
약간 숨 찰 즈음이면 솔오름 정상 AB 코스를 알리는 안내판이 선 삼거리 길, 옆으로 난 완만한 길 대신 주저 없이 비탈진 길로 오른다.
산세 가파른만치 층계가 계속되므로 좀 빡쎄지만 다리 근육훈련에는 더없이 좋다.
무릎만 문제없다면 하체근력운동으로 권장되는 계단 오르기다.
스쾃보다 여러모로 효과적인 것이. 야외 맑은 대기 속에서의 산행이 심신 건강에 그만큼 좋은 이유다.
하여, 집에서는 날마다 빠짐없이 수행하듯 절운동도 병행해 나간다.
감사하게도 아직 허리나 무릎 관절 아파본 적 없어 골격이 잘 받쳐주는 덕분에 건강하게 지내나, 나이 들수록 점차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줄어듦을 느끼는 요즘.
노년내과의로 근육의 중요성을 그리도 계몽시킨던 젊은 의사는 연구원과의 스캔들로 한방에 훅 날아갔지만, 그 의사 덕에 근테크를 위한 섭생과 운동은 착실히 수행 중.
언니를 통해서도 여실히 본 바대로 운동 게을리하면 당장 그 결과치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어느 날 갑작스레 와상상태로 몰아가더라는.
다리에 힘 빠지면 서있기 버겁게 되고 자연 앉을자리 누을 자리 찾게 되며 그때부터 노쇠환자로 가는 지름길이 열린다.
자고로 남자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어쩐다는 말이 나돌듯 다리 근육 약해지는 날, 남녀 불문 별 볼일 없어질 정도가 아니라 온전한 삶은 이미 끝장난다.
이래서 고은층이 될수록 대두되는 운동의 필요성이다.
누가 설계했는지 솔오름 등반로는 강약 조절이 제대로 돼있어서 강도가 센 계단길에 지칠만하면 평지길과 이어진다.
즉 지그재그로 난 길이라 쉬엄쉬엄 숨 돌리며 걸을만하다.
그렇고 치고 올라가다 보면 하늘이 점차 드러나며 정상 송전탑에 이른다.
하얗게 치솟은 송전탑은 내 거처에서도 보일 정도로 우뚝하다.
높은만치 저 아래로 보이는 문섬 범섬은 눈부신 은빛 윤슬 거느렸고 멀리 산방산 봉우리와 송악산 자락도 짚힌다.
그렇다고 여기가 솔오름 전망대는 아니다.
일단 기대에 찬 전망대로 향하기 전, 바다로 향한 의자에 앉아 배낭에 챙겨 온 물 대용 귤 그리고 요거트와 치즈케익으로 요기부터 한다.
행장 가벼이 일어나 심호흡 여러 번 한 뒤 숲길로 들어간다.
옆길로 나있는 소나무 오솔길 살짝 오르내린 다음에야 만나는 전망대, 숨 막히도록 압도해 오는 한라산 웅자가 비로소 마주 선다.
보관(寶冠) 얹은 백록담 마주 보이는 솔오름.
그것도 바로 목전이다.
쉽지 않은 행운 주어진 순간, 깊은 탄성 삼키며 아예 말은 필요 없어진다.
하얀 눈으로 단장한 성스러운 한라산 자태 향하면 세사 오탁 씻겨지며 순결해지는 마음.
눈으로 나누는 대화는 오롯한 기도다.
청원의 기도가 아닌 감사기도다.
서귀포에서의 나날 허락해 주심에 감사.
오늘 하루 선물해 주심에 감사.
이 순간의 감격 벅차게 느끼게 해 주신 하늘 섭리에 감사 거듭 감사.
감사로 충만한 아침이었으니 감사로 마무리하는 하루가 될 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