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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0. 2024

Journal Therapy : 글쓰기 테라피

두 여자가 한의원 대기실에서 만났다. 서로 엇비슷한 초로의 연배였다. 차림새나 분위기로 보아 둘 다 어느 수준의 격은 유지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 나이쯤이면 흔한 비만체질이 아니라 단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표준형인 한 여자는 기미가 낀 흰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마른 편이었다. 읽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기미 씨가 마른 씨에게 물었다.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어요? 며칠 전부터 팔다리에 이상스레 두드러기가 나서요. 요새 이유 없이 멍도 잘 들고요. 그러면서 마주 앉은 여자를 건너다보자 이번엔 기미 씨가 자신의 증상을 얘기하다 말꼬리를 흐린다. 소화도 안되고 불면증이 심해서....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하자 둘은 오래된 친구처럼 격의 없는 대화의 장강을 펼쳐간다. 아마도 나이 탓이리라. 살아보니 어차피 오십보백보. 자존심에 걸려 창피하다며 숨기기 급급하던 일들도 이젠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살아온 굽이굽이 저마다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다. 기미 씨가 한숨 내뱉듯 말한다. 자바시장(LA 한인 의류시장)에서 봉제공장을 하는데 실질적인 일은 다 자기 몫. 남편은 어쩌다 일감이 많이 몰릴 때나 도울뿐 주로 골프 치며 소일한단다. 조석 준비도 소홀함 없이 수발들며 안팎으로 종종걸음질, 그야말로 남편을 상전처럼 '모시고' 살아왔다는 그녀. 동갑내기 남편인데 그녀는 한 번도 반말을 해본 적 이 없다나. 하늘 天 자의 천장을 뚫은 형상이 지아비 夫라 여기며 순종형 아내로 살아온 그녀였다. 게다가 아들이 시원찮게 풀린 것도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한 탓으로 치부된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요즘 들어 생각사록 그간의 삶이 무가치하게 여겨지며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 한다.



이번엔 마른 씨 차례다. 경제적으로는 별 시달림 받지 않고 대체로 유복하게 지냈단다. 다만 가부장제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독선적인 남편을 만나 수없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그녀. 언제나 그녀는 수평관계가 아닌 갑을 관계의 을이었고 상하관계의 하에 해당됐다. 자식들 때문에 그래도 참고 살 수밖에 없었노라고 했다. 수시로 겪는 언어폭력을 피할 재간이 없어 아예 그냥 포기하고 남편과 대거리를 해본 적 없이 죽어지냈노라는 그녀. 대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화를 일기장에 끊임없이 쏟아놓으며 지금껏 그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고. 그녀는 한 번도 부부 화락의 행복을 누려본 적이 없다며 눈길을 내렸다. 요즘 시대에 웬 조선조 여인 스토리냐고? 그러나 어지간한 연령대라면 수긍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날 두 여자를 진료한 닥터는 놀란다. 불면증에 위장기능 저하는 다분히 심인성으로 마음이 몸보다 먼저 격하게 반응한 결과다. 어깨 근육이 심히 경직되어 있고 경락도 막혔으며 가슴에 단단한 응어리가 뭉쳐있는 기미 씨였다. 반면 마른 씨는 어깨도 부드럽고 기혈도 잘 통하고 명치에 맺힌 것도 거의 없었다. 기미 씨 못잖게 한이 쌓여있을 법한 마른 씨인데 의외였다. 다만 갑작스러운 두드러기와 멍은 기 순환 장애현상, 일시적으로 나타난 증상이니 약을 복용하며 스트레스 관리차원에서 마음수련을 계속하라 이른다. 유사점이 많은 두 여자이나 현저히 차이 나는 건강 상태를 접하고 얻은 의사의 결론 중 하나는 글쓰기의 심신 치유 효과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갈대밭에 들어가 소리치자 속병이 나은 설화 속 이발사. 그처럼 마음속에 억눌러 둔 감정의 응어리를 글이란 수단을 통해 외부로 표출시켜 심신 건강을 실질적으로 돕는다는 사례는 수없이 발표되었다. 글쓰기에는 ‘자아 찾기’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스스로 파악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소롯이 담기게 마련이다. 각자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두운 감정을 꺼내서 논리적인 단계를 거치며 언어화시켜 감정의 앙금을 걸러내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다. 개인적 트라우마나 혼란 또는 분노, 그 밖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떤 형식의 글이든 글로 표현해 내는 동안 마음의 근육이 키워지며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분출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가 치료가 되거나 위로의 답을 얻게 된다는 얘기다.   



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글쓰기는 매임 없이 나를, 나의 자아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준다. 글쓰기는 자기를 찾는 가장 내밀한 심리 여행으로 내면에 잠겨있는 감정을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상처와 불안정한 심리가 치유받게 된다.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키며 스스로를 발견하는 시간, 나아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힐링 타임이 된다. 즉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것, 자기 자신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감정은 말로 쏟아놓으면 대부분 덧없이 흩어지지만 글로 표현하면 비로소 의미가 명확해진다. 이런 감정의 객관화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감정이 정리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신체적, 정신적, 육체적, 물리적 모든 족쇄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글이 가진 놀라운 힘으로 단 몇 문장만으로 우리는 자신이 겪은 과거의 경험을 대면하여 직시하고 드디어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도 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어딘가 어떤 방법으로든 감정을 분출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다면 오직 쓰는 수밖에..... 마음을 어지럽히는 상념들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가닥이 잡히게도 되고, 경험한 일에 대해 쓰다 보면 그 경험으로 인한 충격을 둔화시키는 효과도 가져온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억눌려 있던 감정을 마음껏 방류시킬 수 있어 무엇보다 후련하니 좋다. 나아가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또 다른 소통 방식이기도 하다. 테러 벤스는 많은 사람이 자신과 연관된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껄끄러운 관계나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페니베니커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절망적인 체험 등 마음의 상처를 언어로 고백하는 순간 나쁜 기운이 발산되어 심신 건강에 크게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가 내놓은 또 다른 생리학적 증거로는 글쓰기 덕에 혈액 내 질병을 막아주는 림프구가 증가했으며 혈압을 다소 낮출 수 있다고도 했다. 캐슬린 애덤스는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마음을 실제로 읽을 수 있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신감과 자긍심을 키우게 된다고 했다. 한의원에 온 한 여인을 통해서도 확인됐듯 일상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길인 글쓰기. 따라서 글쓰기 습관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기 배려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뇌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뇌의 전두엽을 활성화시킨다. 전두엽 기능이 떨어지면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서장애가 나타난다는데 글쓰기는 이를 예방해 준다. 이처럼 글쓰기를 통해 자가 치료의 효과를 얻어서 건강을 유지하며 백세시대를 대비해 봄은 어떨지.



자신의 병에 대한 글을 쓰다가 루이스 디셀보 작가 실제 자신의 병이 호전되기도 하는 등 정신적 육체적 치유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족감과 자존감을 얻게 되고 한 편의 글을 제대로 써냄으로써 느끼는 성취감도 크다. 비단 글에서만이 아니라 인생에서의 자신감까지 얻을 수 있는 글쓰기. 그 외의 효과로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붙잡아 둘 수 있으며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게 하는 것이 글쓰기이다. 굳이 작가나 어떤 타이틀을 목표로 한다면 부담일 수도 있다. 오히려 자유롭게 쓰는 글이야말로 자신의 행복을 확장해 주고 존엄성을 확보해 주는 장치가 된다. 능력이 된다면 치열하게 아파볼 이유야 충분하다. 복음서의 사도들과 사기를 쓴 사마천, 헤밍웨이, 솔제니친 등이 내놓은 책의 탄생 배경을 보라. 그들은 혹독한 환경이나 암울한 상황에서도 절망적인 순간에 글을 쓰지 않았던가.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마지막 자유이고 최후의 구원이다. 나아가 절대적 권능이기도 하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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