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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0. 2024

진흙 속에 피는 연꽃 가슴에 품고


한가로운 시각의 해운대 바닷가. 모래사장에 아이들이 놀고 있다. 네댓 살 또래의, 인근에 사는 듯한 어린아이들이다. 그중 어떤 아이는 조개껍질을 제 신발에 주워 담는다. 자꾸자꾸 조약돌을 바다에 던지는 아이도 있다. 흥얼거리며 모래성을 쌓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아이는 두꺼비집을 다독거려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한 아이는 돌아앉아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아주 골똘히 그 작업에 몰두해 있다. 들여다보니 추상화 같은 선(線) 그림인데 무엇을 그렸는지 얼핏 알 수가 없다. 아이에게 무슨 그림이냐고 물으니 싱긋 웃고는 손바닥으로 그림을 쓱쓱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내 관심이 다른 데로 옮겨 가는 듯하자 검지 손가락을 세워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양 볼이 발그레 상기된 채 어깨까지 들썩이며 그리고 또 그린다. 점차 자리를 넓게 차지해 나가는 그림. 석기시대 사람들이 새겨 놓았다는 동굴 벽화와 비슷하고 고대인들이 남긴 상형 문자와도 닮은 그림이다. 그림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욕구, 본능적인 표현 욕구가 그 아이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제 신명에 겨운 완벽한 몰입. 어쩌면 그림에 열중하던 그 순간의 아이와 내가 글을 쓰는 행위는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싶다. 쓴다는 그 자체가 좋고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출하는 기(氣)에 밀려서 쓰고, 속에서 이글거리며 터져 나오고 싶어 하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쓴다. 아니, 조리 있게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말에 서툴지 않고 언변이 좋았다면 구태여 글을 쓰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또는 생활이 번다했거나 외향적인 성격이었다면 글과 나는 그렇게 친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가슴 가득 고여 넘실거리는 감흥을 쏟아붓는 방법이 나는 글이었다. 감정을 표출해 낼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수단이 글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내게 있어 열병처럼 온 전신이 달아오르는, 짚불처럼 화르륵 타오르는 격정이다. 문제는 격랑이 일어도 언제나 고요한 물 밑처럼 잔잔하고 차분한 글을 써야 하는데, 글도 사람 따라 함께 널을 뛰는 형국이라 번번이 수필의 격이 떨어져 버리곤 한다.



수필의 격 운운하지만 그러나 실상 좋은 수필은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주제가 분명하고 여운이 향기롭게 남는 글을 좋은 수필이라 한다. 함축과 절제에 무리가 없고 진솔한 자기표현, 신선한 비유법, 적절한 유머 감각 등이 좋은 수필에서는 요구되나 실제에 있어 나는 제대로 된 수필을 몇 편이나 썼던가. 일상적인 신변잡사와 음풍영월식 정감에만 기대어 기분 내키는 대로 가볍게 써댄 글. 결국 문제의식이나 작가 정신의 치열함도 없이 안이하게 글을 써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내 분수, 내 역량만큼의 글 이상을 욕심내지 않고, 잘 써 보려 글에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에 점수를 줄까.



삼십 대 초반, 우리집의 가구는 반들거렸고 이불깃은 잘 먹은 풀기로 삽상했다. 새로 나온 햇 푸성귀로 저녁 밥상을 차리는 일, 아이들 앙증스런 옷을 사 나르는 재미도 시들해질 무렵. 사람을 끝없이 가라앉게 하는 단순하고 평범한 생활에 차츰 지쳐가기 시작했다. 안일한 주부의 일상에 걷잡기 힘든 모래바람이 일며 갈등과 회의가 겹쳐왔다. 산다는 것이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자각은 고뇌를 수반했다. 그 늪에서 헤어나고자 종교에 제법 깊이 빠져 들었다. 그러나 절실함이 없는 신앙은 자칫 관념으로 흐르기 쉬운 것. 빛은 여전히 먼 데 있었다. 어둠에서 허우적이던 그때 만난 것이 글이었고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지주 역할을 글은 충실히 해냈다.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삶에 있어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 글이었으며 글을 통해 나는 구원될 수 있었다.



‘작가마다 환경과 생애가 다르고 그 개성이 같지 않다. 내게는 내 소리가 있고 나만이 해야 할 말이 있고 나만이 가진 수법과 비밀이 있으므로 여기에 준할 작품을 써야 한다'고 윤오영 님은 [수필 입문]에 적었다. 역시 사람은 각자 개성이 다르듯 취미와 관심사가 각각 다르다. 즐기는 일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은 채 뜨악한 관계가 계속되는 것도 있다. 나는 자연에 끝없이 마음이 끌린다. 사람보다 자연에 애정이 더 가다 보니 글에조차 사람은 없고 산과 바다, 꽃과 새가 빈번히 등장한다. 물론 사회적 연관고리 속에 살아가는 나 또한 인간이므로 이웃에 무관심할 수는 없는 일인 줄 안다. 하지만 사람과의 만남은 즐거움도 크나 그 이상의 고통과 실망이 따르고 피곤이 가중된다.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말없는 수혜자일 따름이다. 문학이란 총괄적인 삶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하듯, 살아가는 일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만남도 생활의 일부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반면 나는 사회 수필 쪽에 늘 조심스럽다.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개혁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고 문제의식 자체도 희박하다. 준열한 문학 정신도 부족하다. 또한 철학적 고뇌는커녕 사색과 관조가 깊지 못한 터수에 중수필에 도전해 보기에는 역부족을 실감한다. 객관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이런 류의 수필들에 부담을 느끼나 언제까지 서정수필, 경수필에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과감한 변신으로 수필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는 나. 그러나 자기 고백의 글이자 자조(自照)의 문학인 수필의 속성상 나 아닌 내가 무슨 수필을 쓸 수 있겠는가.



한 나라의 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이라고 한다. 사람의 성격형성에 있어서도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환경이다. 오늘의 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 어린 날의 환경과 무관치 않음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군청 소재지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촌이자 산촌인 외가에서 보냈다. 집이 드문드문 외떨어져 있던 외가 동리이고 보니 같이 놀 동무가 없어 어른들 틈에서 어른 말투를 흉내 내며 삽사리, 병아리와 얘기를 나눴다. 집 안에서는 색색의 헝겊 조각이나 깨진 사기그릇, 장롱 설합 등과 친구였고 외숙모의 심청전, 장화홍련전을 들으며 잠들곤 했다. 그러다 학교에 다니게 되어 다시 집에 왔을 때 나는 아주 낯가림이 심한 수줍은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누구나 다 할 줄 아는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줄넘기가 서툴러 노는 데 잘 끼지를 못하며 점차 달팽이가 되어갔다. 어깨동무하고 뛰놀 친구가 많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수 있었음은 꿈꾸는 달팽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유년기는 나의 소중한 보물 창고이다. 무한한 자연의 얘기가 쌓여있고 함뿍 정을 쏟은 사람들의 눈빛이 머무는 곳. 대호지 외가의 높직한 사당 그 대문에 그려진 태극무늬며 이끼 낀 기왓골, 사랑채 문갑에 놓인 백자와 연적, 벼루는 이런 호기심을 얼마나 끌어당겼던가. 자연과 마주하면 옛 벗을 만나듯 아주 마음이 편안하다. 마찬가지로 나는 유달리 옛 것에 관심이 많고 역사 쪽에 흥미가 당긴다. 박제된 시간 저 건너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런 골동 취미는 아마도 어릴 때 알게 모르게 배어들었음직하다.



이런 자산 외에 나는 달리 문학 수업을 받은 바 없이 글을 써 왔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 아니라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문학 공부를 해야 다다를 수 있는 문학의 한 장르란 인식이 보편화된 요즘, 내 경우가 자랑일 수는 없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처음부터 수필을 써 보겠다고 작정하고 쓴 것이 아니고 붓 가는 대로 쓰다 보니 수필이란 영역에 기항하게 된 셈이다.



수필은 개성적인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처럼 얼마든지 다양한 소재, 자유로운 형식, 자기식의 표현이 가능하므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 아닌지. 누군가가 수필을 읽는 것은 글 읽은 재미라 했다. 스토리의 전개가 스릴이 넘쳐 손을 못 놓는 소설도 아니고 응축된 정서의 승화미에 빠져 드는 시도 아닌 어중간한 길이의 수필. 여남은 장 분량이면서 읽어 내기가 그리 쉽지 않은 글이 수필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처럼 수필이 홍수를 이루는 때에 그 많은 수필을 누가 일일이 챙겨 다 읽어 주겠는가. 제목과 서두에 끌려 몇 줄 읽다가 중도에서 진력을 내 슬그머니 접게 만드는 수필은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한들 성공한 글이라 하기 어렵다. 그만큼 수필은 읽는 맛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읽고 난 뒤의 여운이 남는 글이 중요하지만, 끝까지 읽힐 수 있는 글은 글을 끌고 가는 문장의 힘에 달려있다고 본다. 어느 글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수필에 있어 문장 수련은 기본일 수밖에 없다.



수필은 위대한 문호의 글이 아니면 깨끗한 문사의 글이라 했다. 깨끗한 문사의 글을 지향하며 수필적인 삶을 살고자 하나 현실은 언제나 자갈밭이요, 진창길이다. 인생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거닐고자 하지만 발 뿌리에 아프게 걸리는 자갈돌과 신발을 적시는 진창뻘은 외면할 수 없는 바로 나의 생활이다. 다만 진흙 속에 피는 연꽃 한 송이 가슴에 품고 생활의 여적(餘滴)으로 글을 쓰고자 할 따름이다. -1994, <수필과 비평사> '나의 수필 쓰기'원고 청탁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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