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매월 음력 초하루마다 가는 곳이 있었다. 동심원을 긋고 또 긋는 단조로운 일상의 낡은 반복.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틈새에서 타성 또는 권태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군더더기들로 삐걱대는 그 불협화음을 조율하기 위해선 윤활유가 필요했다. 새벽같이 서둘러 집안일을 해 놓고 팔공산행 버스를 탔다. 부산에서 두 시간 거리였다. 사계의 질서가 묵묵히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윤회의 고리에 나 또한 포함되어 다시금 돌게 될까 물음표도 따랐다. 가파른 비탈길 층층이 오르내린 요량으로야 고단하련만 동참 뒤의 심신은 더할 나위 없이 가뿐하니 상쾌했다. 부득이한 일이 생겨 산행을 거르는 달은 왠지 한 달 내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팔공산행이 신성하고 경건한 종교적 목적만이었다면 아마 나는 진작에 진력을 냈으리라. 오직 기도처로서의 순례만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나 자신을 환기시킬 수 있는 열린 창으로 팔공산은 거기 존재했다. 나를 세척해 내고 정화시키는 장소로서 알맞춤한 곳. 일상에 갇힌 채 갑갑하게 생활해 온 나를 활짝 열고 청소할 수 있는 곳. 거기에서 정결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나만의 세례 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그렇듯 팔공산행은 재충전을 위한 에너지원이며 기꺼운 도락이자 구원처였다. 더불어 무한한 자연, 무량한 시간과 나를 잇대 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내게는 또 하나의 창이 있었다. 생활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내 삶의 여유이며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의 여백에 쏟아내는 글. 글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열린 창이었다. 처음부터 당차게 문학을 해보겠다고 작정하고 쓴 바는 물론 아니었다. 80년대 초, 글과 인연이 닿은 후 내 나름으로 꾸준히는 써왔지만 어떤 형식에도 구속됨 없이 일기 적듯 편지 쓰듯 낙서같이 남긴 글. 그런만치 사상누각의 염려도 없잖았으나 하긴 창작이 문법이나 국문학 강의만으로 가능하던가. 한편으로는 아무런 기초도 닦여 있지 않음에 슬그머니 겁이 남도 사실이었다. 이게 아닌데, 싶은 자괴감마저 들었으나 천성이 아둔하니 대강대강인 데다 매사 야물지 못한 나.
목표도 없었다. 그저 단순히 쓴다는 그 지체가 좋았다. 무한한 자유가 있고 무수한 길이 있는 글쓰기가 나는 마냥 좋기만 했다. 갈망의 연인이며 내 자유로운 향락 그 자체인 글쓰기. 피를 말리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투철한 문학정신의 결여를 꼬집어도 나는 별반 개의치 않았다. 주제 파악 옳게 못하고 대책 없이 몰두해 미치기보다는 문향 언저리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싶을 따름이었으니까. 글이 설령 나를 먹여 살린다 해도 난 그에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즐기고 싶을 뿐. 그렇듯 나에게 문학은 부담 아닌 꿈이며 멋이며 나이와 관계없는 낭만 어린 도취이며 열락이다.
그럼에도 내 글은 르누아르나 모네의 그림이면 좋겠다 싶었다. 난해한 칸딘스키나 피카소는 아니고 18세기 고전파의 찍어 낸 듯한 화풍도 원치 않았다. 그보다는 조선조 선비 유림들의 심심파적 여기였던 문인화 같은 글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나의 글이 감히 난이길 바라지 않았다. 학이길 원하지도 않았다. 수수한 이웃, 무간한 친구로 족하며 나아가 무엇에도 구애됨 없는 마냥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으로 충분했다. 나의 글은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닌 분청이길 바랐다. 태 고운 청자나 백자보다는 쓰윽 휘두른 귀얄 무늬 하나로도 멋스러운 풍류 간직한 분청이 되어 매화 저절로 꽃 피어나는 그런 경지를 터득하고 싶었다. 허나 그건 감히 신의 자리를 탐내는 외람된 욕심이리라.
내가 쓰는 잡문 정도로야 기운찬 산맥 되어 우뚝 서긴 어림없으므로 그저 조촐하니 만만한 뒷동산으로 만족한다. 품위 있는 상차림에 올려진 신선로가 못될 바엔 담백한 소찬의 산채 무침 같은 향기를 지닌다면 족하다. 겨우내 눈 속에서 움 키워온 깊은 산골짝 취나물처럼 쌉쌀하면서도 향긋하니 독특한 맛을 내는 나만의 색과 향을 지닌 글. 그처럼 개성 짙은 글을 쓰고는 싶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많고 많은 글 중에 눈에 번쩍 뜨일만한 글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힘들고 아득한만치 나는 더욱 매력을 느낀다. 기왕이면 글 속에서 치열하게 활활 불타 보고 싶다. 뜨겁게 타고 또 타 마침내 재마저 다 타 버린 들 어떠랴. 그 가운데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 불새에 빛 부셔하다 혼절해도 좋으리니.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