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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2. 2024

대서사시 옐로스톤

지난여름, 눈앞에 신비로이 펼쳐진 대자연은 경이 그 자체였다.

장엄무비.

변화무쌍.

무한외경.


웅장한 베토벤 교향곡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천지창조 이후의 위엄 어린 대서사시를 들려주는 곳. 북미 대륙의 와이오밍 몬태나 아이다호 세 주에 걸쳐 펼쳐진 옐로스톤이다. 세계 최초이자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 마그마가 지표 가까운 5킬로미터 깊이에 깔려있다니 여차하면 언제든 시뻘건 불덩이를 토할 수도 있는 두려운 이방지대다. 수십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용암 활동지역이라 지금도 지구가 쉬는 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로키산맥 한 지류에 위치한 옐로스톤.


    
들끓는 용암지대이다가 험준한 산자락이다가 깊디깊은 계곡이다가 내리 꽂히는 폭포이다가 드넓은 평원이다가 창창히 펼쳐진 호수이다가 아득한 연봉들이다가 마침내 새카맣게 불타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새순 푸르게 움트는 여기가 바로 화엄천지요 이곳이 곧 평화로운 천국이자 숨 가쁜 지옥도 이리.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자 거기 새로운 생명과 역사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창세기 그때 아마도 이처럼 모든 것이 풀떡거리며 요동질 쳤으리. 어질어질 땅이 흔들리고 호수는 용트림을 하고 강물은 부글부글 끓고 용암은 하늘 높이 솟구쳤으리.


                           
간헐천과 핫스프링, 강과 호수, 산과 숲, 황야와 협곡, 폭포와 기암괴석, 미개척지의 야생동물들까지 온갖 천태만상이 망라된 그야말로 만물상이다. 지구 간헐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많은 가이저가 산재해 있는가 하면 정확한 간격으로 하늘 높이 하얀 물기둥을 기운차게 뿜어 올리는 올드페이스풀의 장관이 기다리는 곳. 처처마다 기이하고 거대하고 신기함에 압도당하고 만다.


                     
거칠게 내닫던 강물이 우레같이 소리치며 쏟아지는 어퍼폭포 로워폭포 주변에 뜨는 비경의 무지개. 눗누런 협곡이 장쾌하게 이어지는 그 아래 빙하가 계류를 이룬 옐로스톤 그랜드캐년의 위용. 나아가 북미 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로 고도 2천4백 미터에 위치해 있는 바다같이 너른 호수의 망망함에는 그만 기가 팍 질린다. 노리스 간헐천의 머드 볼케이노와 증기를 내뿜으며 예서제서 제멋대로 솟구치는 높고 낮은 핫 스프링. 그에 경탄하다가 드디어 와우~ 감탄사마저 잊게 만든 미드웨이 가이저 지역에 이르러서였다.


                
오팔 풀 에메랄드 풀 사파이어 풀, 이름 그대로 보석처럼 아름다운 쪽빛 옥빛 투명히 고운 연못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뜨거운 온천수가 끊임없이 올라오며 퐁퐁 솟구치는 물방울 그리고 자욱이 피어오르는 수증기. 유황냄새가 온 데서 진동한다. 연신 물이 넘쳐흐르는 연못 주위 낮은 지대에는 환상적인 파스텔 톤의 너른 띠가 색 고운 무지개 빛으로 바닥에 깔려있었다. 물의 온도에 따라 서식하는 플랑크톤의 종류가 달라지며 빚어낸, 이곳에서만이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풍광이다.

                            

뜨거운 온천수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니 그들의 생존방식이 희한하다 싶었다. 넓디넓은 세상, 극지와 해저 등 생물이 살아가는 데는 별의별 곳이 다 있긴 하지만 하필이면 이렇듯 별난 조건하에서 그들은 나름 살아가고 있었으니. 주어진 자리의 특성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들만의 고유한 생리 조건이 갖추어져 있겠으나 퍽 놀라운 일이었다. 태초부터 그렇게 빚어졌는지 아니면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되었는지. 아무튼 그 온천수가 그들에겐 최적의 생활여건인 모양이다. 통행로로 이어진 나무데크 아래로 흐르는 물에다 손끝을 살짝 대어보았다. 아주 뜨거웠다. 북극 크릴새우를 집어넣으면 금세 빨갛게 데쳐질 온도였다.


                                   
지난봄 딸내미가 보낸 <차마고도> DVD에서 보았던 '천년 鹽井'이 순간 그 풍경에 겹쳐졌다. 황량한 산자락에 일군 다랑이 염전 밭이 타일 모자이크처럼 아름답게 담겨있던 다큐멘터리물이었다. 평생 물지게를 지어 나르며 염전일을 하는 티베트 동부 산간오지의 여인들. 소금물이 솟는 우물에서 언덕 위 염전밭까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올라야 하는데 무거운 지게를 지는 그 고된 일을 오직 여인들만이 해내고 있었다. 그녀들이 부르는 노동요는 애절한 가락에 한 서린 가사였다. 남자들은 염전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라며 천년토록 오직 여인들의 땀과 눈물로 소금을 일궈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떻게 대대로 그리 신산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가 퍽 궁금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명천지 바깥세상을 도대체 알고나 있는 걸까. 차와 말과 소금을 서로 사고파는 교역로가 뚫린 지는 아주 오래전. 따라서 외부 세계와 절연된 채 살아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삶의 불합리성을 교정해보려 하거나 불만을 제기하지도 못하고 그냥 전통이니까 묵묵히 따른다니. 나아가 힘겨운 생활을 개조 내지는 변화시켜 볼 적극적인 의지나 용기도 없었던 것인지가 내내 의아스러웠다. 아니 그 이전, 미지의 세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꿈꾸거나 동경해 본 적조차 없었던 걸까.


                       
미드웨이의 환상적인 무지갯길을 따라 걸으며 내동 사로잡혀 있던 그 생각. 문득 탁! 하고 정수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너라고 다르더냐? 피장파장이요 오십보백보로 바로 네가 그 짝이 아니냐고 종주먹을 들이대는 내 안의 또 다른 나. 불안한 변화보다 숨 막히게 갑갑한 현실일지라도 그냥 안주하고 말기로야 플랑크톤이나 티베트 여인뿐이 아니지 않은가. 나 역시 불가항력의 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양 무기력하게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물론 그럴듯하게 자신을 합리화시켜 가는 한편으로는 내부 갈등을 슬슬 구슬려 타일러가면서. 더러는 환경과 조건 탓을 하기도 하고 요즘 들어서는 자신감을 잃게 하는 체력과 건강이며 나이를 핑계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과감한 변혁을 두려워했던 거다.


                                   
삶에의 도전이라면 시도조차 무모한 짓이라고 최면을 걸다시피 하면서 외적 자극에 짐짓 고개 돌려왔던 셈이다. 그렇게 자신을 달래 가며 한심스러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축나버린 아까운 시간들. 나를 비롯 대다수가 실제로, 길들여진 일상이 편하고 안락하므로 가보지 않은 길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는다. 그처럼 변화보다 현상 유지를 더 선호하기에 마뜩잖은 직업이나 참기 힘든 환경에도 줄곧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내가 바로 그 플랑크톤이고 그 티베트여인이었음을 왜 몰랐던가. 온천수의 온도에 따라 색깔이 바뀌며 환경에 적응하는 플랑크톤이요, 비좁은 비탈길을 수천 번도 넘게 물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는 티베트여인이 바로 나였다. 회한이라기보다 솔직히 억울한 감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누가 조물주의 계획에 왜?라는 의문의 물음표를 달며 외람되이 따질 것인가. 저마다의 작품에 하나하나 오묘한 섭리를 새겨 넣은 그분이시라는데. 그 길, 주어진 외길을 거부하거나 거역하지도 않았고 옆길을 곁눈질하며 딴청 부리지도 않은 채 미련스레 살아온 것이 대견한 일인지 바보 같았는지는 나 지금 당장은 알 수가 없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는 마지막 순간에야 읽을 수 있는 것이므로. 2009
                     
          <아래 사진은 픽사 베이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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