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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대에 선 고산 시비 앞에서

고산 흔적 여기도

by 무량화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일광해수욕장 일대는 삼성리에 속한다. 현재는 카페와 호텔과 횟집 같은 식당이 몰려있는 바닷가를 끼고 있다. 삼성리란 지명은 이 마을 안에 있는 낮은 둔덕 삼성대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때 편찬된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 삼성대는 군(郡)의 동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정도다.



臺는 높이 쌓아 올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평평한 곳이라는 뜻으로 존경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돈대(墩臺) 대다. 청와대와 천문대에도 같은 대(臺) 자가 들어가는 것으로 미루어 평지보다 높은 곳이 맞긴 맞다. 삼성리에 있는 삼성대 역시 약간 돌출해 둔덕지긴 했으나 어떻게 이 자리에 삼성대(三聖臺)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정확한 유래는 문헌상의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아 불확실한 채로 가설만 분분하다. 세분의 성인이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고려 말의 삼은(三隱)인 목은(牧隱) 포은(圃隱) 도은(陶隱)을 칭한다고도 한다.



삼성대를 기리는 비는 일광해수욕장 바로 앞 대로변에 서있다. 바짝 곁에는 고산 선생 시비가 우뚝하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어부사시사를 남긴 시인 윤선도. 선조와 광해군과 인조를 군주로 모신 해남인 고산이 어찌해 삼성대에 시비가 남겨졌을까. '동생과 헤어지면서 시를 지어 주다’라는 뜻의 증별 소제(贈別少弟) 2수를 지은 곳이 바로 이 자리였다. 고산이 '신유년 8월 25일 삼성대에 이르러 보내면서 지었다”라는 주(註)를 손수 달았으므로 이는 확실한 팩트다.


임금에게 충정 어린 직언을 한 까닭에 한양에서 천리나 떨어진 경상도 기장 바닷가로 유배당한 고산이다. 그 시대나 이때나 탐관오리가 활개 치는 부패한 정부였던 모양이다. 적소로 고산을 찾아온 아우가 돈을 주고라도 유배에서 풀려나자며 '​납전해배(納錢解配)''를 권유한다. 우애 깊은 형제간이라면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법.
적소에서 고초 겪는 형님을 위하는 동생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바 아니나 고산은 끝내 거절한다.



선비로서의 강직한 절개를 지키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 단호했던 고산. 뜻 이루지 못하고 할 수없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동생 배웅 차 십릿길 동행한 뒤 삼성대 앞에서 아쉽게 이별하며 시 한 수를 남긴다. "네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에 얼마나 많은 산이 가로막을 것이며/ 세상의 흐름을 따르자니 얼굴이 부끄러워지는 것을 어이 하리오. 이별할 때가 되니 천 갈래로 흐르는 눈물이/ 너의 옷자락에 뿌려지면서 점점이 아롱지는구나.
若命新阡隔幾山 隨波其奈赧生顏 臨分惟有千行淚 灑爾衣裾點點斑" 내 말은 내달리고 너의 말은 더디기는 하나/ 이 길에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하리오. 제일 무정한 것은 이 가을 해이니/ 헤어지는 사람을 위해 잠시도 멈추어주질 않는구나. 我馬騑騑汝馬遲 此行那忍勿追隨 無情最是秋天日 不爲離人駐少時" 삼성대 앞에서 동생은 한양으로, 고산은 유배지인 죽성 마을로 말머리를 돌리게 된다.


평소 효성 극진했던 고산은 귀양살이하는 몸이라 선고의 기일마저 찾아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글로써 대신하였다. 문집 고산유고에 실린 제문은 이리 절절하다. "상략.... 천지는 다함이 있지만 애통함은 끝이 없습니다. 북쪽을 바라보며 한차례 통곡하니, 소리가 오열하고 기가 막히며 창자가 꺾이고 가슴이 찢어져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후략." 현대에도 상소문이 등장하더라만 광해군 8년인 1616년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아래와 같았다. 예조 판서 이이첨의 국정 농단으로 조정 어지럽힌 죄를 벌할 것과 왕비의 오라비 유희분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을 올렸다.



고산은 약관의 성균관 유생 때 목숨 걸고 바른말로 간한 '병진소'로 인해 삼십 대 한창 시절에 6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유배지인 기장 죽성 마을엔 아직도 고산의 흔적이 황학대 등 다수 남아있다.
죽성에서 고산은 의생으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펴내며 가난한 어민들의 건강을 돌봐왔다고 한다. 당시 형님을 만나러 왔다가 한양으로 되돌아가는 아우를 배웅하던 중 삼성대에 이르러 형제는 작별을 하게 된다. 이때 고산은 시 2 수를 남기므로 발자취 분명하게 이 자리에 새겨졌다.



인조반정 이후 고산은 관직을 물리고 학문에 전념하며 은거하다가 예송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령에 다시 유배생활을 한다. 81세에 겨우 석방이 되었으며 보길도로 들어가 여생을 한적하게 지내다가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삼성대 고산 시비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굴곡 많은 삶의 여정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되새김해 본다. 그 정신 오늘에 살려 모두의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갈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정의롭고 공정해지련만.


“삼가 아뢰옵니다. ㅡ상략ㅡ근래에 태양의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지진이 누차 발생하였으며 겨울 안개가 사방에 가득했었으니, 이는 모두 재변 가운데에서도 큰 재변이었습니다. 신은 이런 재변이 오늘날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재변은 까닭 없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지금 이이첨은 권세를 독차지하고 멋대로 휘두르며 말류의 폐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시험장에서 감독관과 내통하였다거나 시험의 제목을 미리 누출하였다는 등의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올해 별시인 전시(殿試)의 급제자 가운데에는 이이첨의 네 아들이 모두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거나 차작(借作)을 하여 과거에 오른 일에 대해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그 네 아들이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재주와 명망이 없는데도 잇따라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혹은 전혀 문장을 짓는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너무 쉽게 오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ㅡ하략ㅡ<병진소 일부>


조선시대에도 요즘 누구처럼 입시부정을 저지르듯 과거제에 비리가 끼어들었다는 점 놀랍지 않은가. 설령 과문의 탓일지라도 너무 뜻밖이라서 기가 찼다. 고산의 병진소 골자는 '폐행신(嬖幸臣)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며 의정(議政) 박승종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 버렸다'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이첨의 모함으로 고산은 외려 귀양길에 오르게 되면서 함경도로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당한다. 위 폐행신이란 상부에 아첨하여 무진 총애를 받는 신하를 이른다. 그날 기어코 나는 삼성대에서 머잖은 고산 유배처였던 죽성마을로 사부작사부작 걸음을 옮겼다.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나아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고산 윤선도의 연시조 <어부사시사>를 모르는 이 없으리라. 보길도 부용정에서 만년을 보낸 고산은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최고봉에 오른 가인이다. 어지러운 현실을 초월해 자연과 교감 나누며 아름다운 서정시를 엮어나간 그다.

그는 생애에서 16년간을 유배지라는 폐쇄된 공간에 머물었으나 갇혀있으되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다.



명문가 자손으로 편안한 생을 살 수 있었음에도 올곧은 지조로 최고권력의 실세들과 맞섰던 시대의 지성인. 여섯 살 때 임란이 발발했고 50대에 이르러 병자호란을 겪은 윤선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내야 했다. 그는 관직에 오르자마자 광해를 업고 권세를 휘두르며 비리 일삼는 이이첨을 고발, 최고실세에 저항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그 상소문으로 하여 혈기방장한 서른의 윤선도는 최북단 함경도로 유배를 간다. 고산은 이듬해인 1618년 광해군 9년 겨울에 동래부 기장현 죽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동해바닷가 기암괴석과 해송이 어우러져 자연경관 수려한 죽성마을에는 그 지명대로 곧게 자란 대나무가 흔하다. 죽성마을은 일찍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에 시달려온 터라 이미 조선초기 병영이 있었던 어촌이다. 멀지 않은 곳에는 두모포진 성이 있어 병선 십수 척과 군사 8백여 명이 상주하는 수군진영이었다. 포구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구릉에 쌓아 올린 왜성은 노략질 패거리들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조선백성을 징발해 축성하여 각지에서 걷어들인 양곡과 잡아온 도공들을 유치시켜 놨다가 왜로 실어갔다.



바로 그런 아픈 역사의 장소인 왜성 아래로 유배를 온 고산은 바닷가 황학대(黃鶴臺)에 올라 파도소리 벗 삼아 시름을 달래며 독서로 지샜다. 이곳에서 젊은 고산은 견회요(遣懷謠), 우후요 (雨後謠) 등 보석 같은 시 여섯 수를 남겼다. 틈틈이 뒷산에서 구한 약초로 가난한 민초들을 병마에서 건져주었기에 주민들은 그를 '한양에서 오신 의원님'으로 뫼셨다고. 죽성리는 기장읍에서 순한 산자락을 서너 차례 굽이돌면 나타나는 해변 마을로 원죽, 두호, 월전 등 세 개의 자연부락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드는 죽성리 왜성은 낮으막한 야산 위의 석성으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돼 있다. 아직은 앙상한 나목 봄눈 틔우는가 하면 성터 위로 무심한 구름장 흐르고 무너져 내린 바윗틈새엔 봄이 왔다고 진달래꽃 몇 송이 피었다. 석성 흘러내려 지금은 출입이 금지돼 있으나 조선시대 백성들처럼 쪼그린 채 왜성 오르는 산길에서 햇나물 뜯는 사람들이 보인다. 솜을 둔 백의 아닌 패딩재킷 잔등에 봄볕 다사로이 내린다.



바닷바람 맞으며 자란 쑥은 약쑥이라 알려졌기에 양지녘 마른 풀섶 사이에 돋아난 쑥을 뜯었는데 잠시만에 한 봉지를 채웠다. 허리를 펴자 마주 건너다 보이는 바다 쪽 구릉에 독야청청한 상록 노거수 하나. 죽성리 해송은 마치 단아한 분재를 연상시킨다. 고산이 유배가 풀려 머물던 적소를 떠나자 바로 옆 야트막한 언덕에 고산의 푸른 기개를 그리듯 자라기 시작했다는 해송이다. 300년 가까이 죽성 바다를 지켜온 기품 있는 자태에서 마을 수호목의 위풍당당함이 넘쳐난다.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50호이자 보호수인 해송(곰솔)은 멀리서 보기엔 한그루 나무 같으나 여섯 그루가 모여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었다.



소나무 사이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서낭신을 모신 국수당(國樹堂)이라는 작은 당집이 자리했다.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목(神木)으로 여겨져 온 나무 사이에 당집이 있는 경우는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수호목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랫마을 평화롭다. 고산 당시의 예전 황학대는 황학이 나는 듯했다는 해변가로 바위섬이었으나 앞바다 매립해서 현재는 뭍이다. 맨 끝에 죽성성당과 등대가 보인다. 드라마 세트장으로 지었다는 죽성성당, 지금은 젊은이들의 포토존이 된 바닷가 이쁜 건물이다. 칩거의 너울을 벗고 긴 터널 나서서 간만에 갈맷길 따라 걸으며 대여섯 시간 흔쾌하게 보냈다. 가벼이 사부작거렸는데도 노곤했던 모양,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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