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프링! 뜻 그대로 솟구치는 활력 전이받은 축구 개막

by 무량화


반세기 만이다.

힘찬 젊은이들의 함성 속에 하나로 녹아들기도.

60년대 말, 유학을 간 서울의 삼촌 집에서 최초로 TV를 접했다.

활동사진이 달린 라디오, 티브이를 첨 보면서 그때 그렇게 신세계가 열렸다.

1966년 나쇼날이란 회사에서 브라운관 TV를 생산했으나 당시 티브이는 거개가 미제 아니면 일제였다.

그 덕에 숙모와 안방에서 아시안게임을 중계방송으로 보며 축구 경기에 열광했던 기억을 소환할 수 있게 됐다.

손바닥 불나도록 박수를 쳐가며 함성 지르던 스무 살 즈음, 특히 축구에 매료된 삼촌은 경기 때마다 티브이 앞에 진을 쳤다.

차범근 선수가 운동장을 주름잡던 그 시기보다 십 년 전쯤 일이다.



TV가 국내에 대중적으로 선을 보인 건 금성사(현 LG전자)로 1968년, 야심차게 흑백 TV를 내놨다.

19인치 화면에, 긴 다리가 넷 달린 가구같이 생긴 최초의 국산 TV였다.

생산직 근로자의 1년 연봉(약 6만 8000원)과 맞먹는 수준임에도 구매하려는 사람이 줄을 서, 공개 추첨을 통해 판매할 정도였다.

워낙 고가인 탓에 TV 있는 집이 흔치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지방 보급은 전무했다.

값도 값이지만 있어 봤자 전력 송출량이 낮아 전기불도 수시로 나가던 때라 티브이는 켤 수도 없었을 테니까.

1960년대 후반만 해도 TV 보급 수는 전체 10만 대에 불과하던 시대였다.

흑백 TV가 출시된 지 10년이 흐른 후, 국내에서 첫 컬러 TV가 생산은 되었으나 미주 등지로 수출되는 외화벌이 주력 상품이었다.

내수용 제품을 내놓은 건 1980년, 그동안 KBS와 동양방송이 일일연속극 전성시대를 열며 TV 보급률도 급속도로 늘게 되었고.

현시대 젊은이들은 웃겠지만 전자레인지가 첫 출시된 때는 1981년도다.

당시 금성사(현 LG)에 다니던 남편이 여름 보너스로 전자레인지를 받아왔으나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공식품 유통이 적던 세월이니 용도 극히 제한적인 전자레인지라 수요처가 없어서 직원들에게 선심 쓴 셈.



축구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한국 축구의 역사는 1905년 6월 10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시합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발족돼 1948년 런던 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국제 대회에 출전하였다.

말 그대로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을 뿐인 출전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195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FIFA 월드컵 출전부터가 명실상부한 출발이리라.

여기서 튀르키예에 0-7이라는 큰 점수 차로 패배하면서 대회 꼴찌로 세계의 높은 장벽을 실감한 채 귀국했지만.

1964년부터 1972년까지의 대한민국 축구 리그는 실업축구와 대학리그 토너먼트가 주를 이루었다.

6~7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한 선수는 단연 김정남으로 침착한 플레이로 유명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투지를 불태우던 김호 선수 또한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였다.

그는 김정남과 콤비를 이뤄 1970년 아시안게임 당시, 새마을운동에 매진하느라 땀 흘리던 국민들에게 금메달을 안겨줬다.

이회택 박이천은 그다음 세대를 이끈 뛰어난 축구 선수들이었다.

차범근 허정무가 활약한 80년대, 이어서 홍명보 황선홍이 국제경기 때마다 승리의 바통을 계승했다.

이천 년대 들어온 국민이 열광한 박지성 이영표와 팀원 모두가 만방에 태극기 휘날리게 했다.

그다음 세대인 손흥민 박주영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활약하며 한국 축구는 비약적인 발전상을 보여왔다.

특히 역동적인 물결 출렁이게 했던 2002년 월드컵 당시, 국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붉은 악마의 힘은 데일 듯 뜨거웠다.

일요일이라 필라델피아 성당 잔디밭에 모여서 경기를 관전하던 교민들 중 일부는 응원 셔츠까지 입고 와 기분 한껏 뜨겁게 했다.

독일전에서 석패, 비록 4강 진출은 못했지만 그때의 흥분과 감격은 두고두고 우리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나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에서 프로 축구 K리그가 시작되던 날.

제주 유나이티드와 수원 FC와의 홈 개막전을 관람했다.

역대 가장 많은 유료 관중이 몰렸다더니 인근 도로 혼잡은 물론이고 인파가 그리 많이 모인 건 오랜만에 봤다.

기나긴 코로나 터널을 지나 신춘다이 온화하고 청명한 날씨였던 지난 일요일 오후 2시.

시작 한 시간여 전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경기장 주변은 사육제 날처럼 흥청흥청 들떴었다고 한다.

한 시 반, 서포터스들과의 약속시간에 맞춰 왔으나 밀리는 차량 홍수 속에 바로 경기장 보이는 도로상에서 십여 분 지체됐다.

부랴사랴 입구 쪽으로 달려왔으나 인산인해 이룬 인파에 밀리며 일행은 도저히 찾을 수도 없었다.

고맙게도 서포터스 한 분과 연결이 되어 허겁지겁 입장권 전달받아 1번 게이트로 들어갔다.

와우~뜨겁게 달궈진 분위기도 대단했다.

친지 또는 가족들과 봄 소풍 나오듯 가벼운 차림으로 음식까지 준비해서 즐길 준비 완료한 관객들.

마스크에서 해방된 데다 목청껏 소리 지르며 응원가를 부를 수 있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손에 손에 든 응원 플래카드 흔들면서 환호하며 마냥 들뜬 채 경기장에 고정시킨 시선들도 풋풋하니 생기찼다.

고조된 열기 하늘 찌를 듯 함성소리 드높았고 저마다 흥분된 표정에 기대감도 만땅!

경기는 아슬아슬 긴장감 자아내게 하는 몇 장면도 연출됐으나 막바지 패널디킥 기회도 무산되며 득점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젊은이들과 혼연일체 되어 경기를 즐겼지만 서너 번 위급 상황이 벌어져 부상자가 생길 적마다 짠해지는 건 나이 때문?

몸끼리 부딪쳐 심한 충격을 받고 바닥에 쓰러진 선수는 저마다 제 집에선 귀한 아들들이다.

나뒹구는 선수도 괴로왔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부모들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인지 부상 선수가 생기면 애타는 심정으로 현장을 사진에 담곤 했다.

하여간, 이날의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은 오래 잊지 못할 날이자 장소가 될 터이다.

스프링! 뜻 그대로 솟구치는 활력 전이받은 축구 개막전 관람.

특히 서귀포 시청 서포터스 활동을 하게 된 행운도 축복이다.

기다려준 냥이님 대단히 고마웠어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