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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좋은 것

2014

by 무량화


플라타너스 주욱 늘어선 가로를 걷는다.

싱그런 잎새 팔랑이는 봄도 그러하고 녹음 짙푸른 여름에도 이 길은 꽤 근사한 편이다.

커다란 잎새들이 뚜욱뚝 지는 가을이나 코발트빛 벽공에 선화 그리는 겨울이나 철 따라 제각기 운치 있는 길이다.

공해물질 정화기능이 있어서 도심 가로수로도 각광받는 플라타너스다.


고개를 젖히고 새잎 피어난 나무를 올려다보니 그새 잎자루마다 콩알만 한 연둣빛 아기방울들이 매달려있다.


열매가 달렸다면 분명 꽃도 피었을 텐데 어느 결에 꽃을 피우고 작은 결실들을 맺었을까, 비밀스런 섭리가 신비롭기만 하다.

발치에 뭔가가 투욱 차인다.


플라타너스 묵은 열매다.

그 단단하던 열매가 봄이 되니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푸석하니 퍼져버려 본디의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길섶에 뭉실거리며 솜뭉치마냥 모여있기도 하고 더러는 먼지처럼 둥둥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마치 털갈이 중인 누렁이라도 놀고 간 자리이듯 여기저기로 쓸려 다니는 누런 솜털은 플라타너스 씨앗들이다.


요즘 들어 알러지가 극성을 부린다 싶더니 창틀에 보얗게 먼지 쌓이듯 하는 버드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 꽃가루들에 한몫 거든 플라타너스였겠다.



만화방창 다투어 피는 화려한 봄꽃 틈새에서 아무도 모르게 저 높다란 나무에 저 혼자 피었다 져버린 꽃들.

그처럼 누구 하나 아는 척 해주지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꽃을 피웠다가 저마다 내심 옹골찬 결실을 마련한 생명들이 미쁘다.

지난 겨우내 나목 끄트머리에 매달려 추상화를 연출하던 플라타너스 열매다.


삭풍의 겨울을 견디고 그래도 굳건히 가지에 붙은 채로 대롱거리며 모진 계절을 건넌 열매들이다.

견고하던 플라타너스 열매는 봄이 되자 제 스스로 땅에 떨어져 푸석푸석 몸을 풀기 시작한다.

기나긴 숙성기간 동안 충분히 곰삭힌 영혼 되어 이젠 본향으로 돌아와 가슴 빗장 열었다.

애초의 견고한 갑옷 벗고 깃털 하나 무게로 제 존재를 완성시키는 플라타너스 씨앗.

기나긴 여정을 마친 다음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열매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으깨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생명 품은 씨앗을 만방에 퍼뜨릴 수 있게 된다.

죽어야 사는 이치대로다.

저마다 살기 위해 기를 쓰는데 죽어야 산다니 모순된 언어의 유희 같지만 맞는 말이다.

진짜 죽어야만 산다.



오래전, 심한 봄장마로 보리 수확기를 놓치고 만 어느 해의 기억이다.


긴 장마로 거두지 못한 채 밭에 누운 축축한 보릿대 꼬투리마다 푸른 싹을 틔우고 있었다.

농심을 애타게 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발아해 버린 씨눈들은 마치 엿기름 같았다.

보리농사를 망치고 만 그해 보릿단은 마구 베어져 두엄으로 던져진 채 하릴없이 썩고 말았다.

제대로 때맞춰 수확된 보리라면 타작마당에서 실컷 도리깨질을 당한 뒤라야 겉껍질 벗고 쓰임새 온전한 낱알이 된다.

마구 두들겨 맞고 짓밟혀 으스러지고 부서지는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알곡으로서의 효용가치를 획득할 터인데.

이처럼 내 안의 나를 고집하지 않고 깨어지고 부서져 본디의 생명이 죽어줘야만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걸 플라타너스 열매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국의 조지 뮐러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분이다.


어떤 사람이 말년의 뮐러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느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누구라도 진정한 부활에 이를 수 없음이니.


지금은 때마침 사순시기다.




지난날들, 꽤나 힘겨웠다.


페미니즘이 막 기지개를 켜던 당시였다.


결혼이 평등한 인격체끼리의 만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남자는 하늘이라는 가부장제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유독 봉건적인 경상도 사람, 그런 동갑내기 남자와 만나 사사건건 마찰 빚으며 걸핏하면 맞섰다.

서로 지지 않으려는 강한 자아와 자아의 무수한 충돌.

둘 중 하나 누구든 먼저 소금에 푹 절여져야만 가정이 편함에도 매번 꼿꼿이 들고일어나던 그 풋기라니.

젊어서는 나를 접어 포기하거나 바닥에 내려놓는 일, 나아가 나를 다스리는 일이 도무지 쉽질 않았다.

하물며 무조건 나를 죽이라고? 일방적인 희생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는 게 늘 불만족스러웠다.



사니 안 사니 아웅다웅 지지고 볶으며 산 세월이 어느새 반백년 가깝다.


이젠 피차 서로 많이 양보하고 죽어준다.

시퍼렇던 서슬도, 빳빳하던 결기도 한결 눅어졌다.

솟대 같은 자신감 외에 젊다는 것이 다 부러운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파란만장 우여곡절로 표현되는 결혼이라는 여정.

무간한 또래모임에서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열다 보면 대부분이 그로 인해 서너 권의 소설감을 만들어내며 살아온 자취들이 노정된다.

제각각 솔직히 털어놓고 보니 너나없이 용케 그 험한 파도를 넘어 오늘에 이르렀구나 싶어진다.

좌초될 것 같은 위기마다 바로 서게 해 준 힘은 전적으로 자녀들에게서 나왔다는 결론도 대동소이하다.

주체 못 하게 솟구치는 분노와 화를 다스리게 해 준 것은 번번이 뒷전에 선 아이들의 말없는 응시였노라고.

그렇지 않다면 진작에 반납하고 만 결혼생활이었을 것이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이제는 그럭저럭 플라타너스 열매처럼 주저 없이 스스로 으깨지고 부서져 줄 수 있는 연배가 됐다.

나이가 들고 보니 참 좋다.


그 사이 성격도 둥글둥글 모서리 깎이며 많이 너그러워지고 수더분해졌다.

숫돌구경을 도통 못한 칼처럼 무뎌지고 둔해졌지만 아주 편안해서 좋다.

매사 내 탓이요, 가슴 치며 지고 사니 싸울 일이 없다.

날 잡아잡수, 먼저 죽어주니 더 이상의 왈가왈부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수 없이 편하다.

날카로이 각을 세운 채 하시라도 공격할 자세를 풀지 않고 산다는 것은 서로 얼마나 피곤한 일이었던가.

장자 왈 '하늘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늙음을 주었고 우리를 편히 쉬게 하기 위해 죽음을 주었다'고 한 말 제대로 수긍된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털북숭이같이 몰려다니는 씨앗을 단 솜털들.


그중의 대부분은 청소차의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고 말 테지만, 하느님 계획에 따라서는 너른 그늘 드리우는 큰 나무로 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3억대 1의 확률로 명을 허락받아 세상의 빛을 보는 우리처럼 작은 씨앗 하나에 더러는 위대한 탄생이 예비되기도 하였으리라.

뉴저지 비옥한 평원 푸른 숲 어디쯤엔가 이들 중 어떤 씨앗 하나가 안전하게 착지하여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문득 간곡해진다.

김현승 님의 시구처럼'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너를 맞아 줄 검은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이윽이 묻고 싶어지는 오후녘이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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