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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새삼 그리워

by 무량화

광음유수(光陰流水)라 하였다.

이십 년 세월이 물처럼 흐른 뒤 다시 와본 옛 살던 터전 망미동 토곡.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대호지를 찾았다가 느꼈던 오래 전의 추연한 감회와는 결이 다르나 왠지 모를 애잔한 느낌이 든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들렀던 충청도 대호지 시골마을은 확장된 도로 외엔 별로 바뀐 게 없었다.

다만 수문통이 있고 긴 제방 둘러친 큰 방죽이 둠벙만큼 졸아들었는데 놀랐고 내 놀이터였던 사성국민학교 운동장이 손바닥만 해서 또 놀랬다.

반면 망미동은 위압적인 고층 아파트 빙 둘러선 기세에 눌려 상대적으로 더 초라해진 소형 아파트가 골목골목 밀집해 있는 동네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망미역에서 하차해 토곡 방향으로 올라오면 예전에 살던 망미동이다.


고려시대 정서가 유배와 정과정곡을 남긴 정과로와 겹치며 임금을 멀리서 그리워하면서 읊은 가사에서 망미동(望美洞)이 유래했다.



살 당시만 해도 그리 비좁은 줄 몰랐던 골목길은 다닥다닥 붙은 빌라와 전선줄만 이리저리 늘어선 채 하도 빈약해 애처로울 정도.

새롭게 변한 건 망미시장통으로 절임배추와 김치특화시장으로 자리매김되며 아케이드로 현대화시킨 신식 시장이 되어있었다.

전에는 여늬 동네시장이 그러하듯 보잘것없는 데다 구질구질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능곡지변(陵谷之變) 뜻대로 몰라보게 변했다.

원래 솜씨 곰살스런 살림꾼은 아닌지라 배추를 절이면 간이 너무 쎄서 짜거나 또는 너무 약해서 배추가 도로 밭으로 가려는 형국이었다.

하여 김장배추는 절인 걸 주문해 쓰곤 했는데 그때 천일염 훌훌 뿌려가며 배추 절이던 아짐 이제는 큰손 사장님 됐겠다.

행여나 쥔장 그대로일까? 단골이던 과일가게며 방앗간, 건어물가게도 기웃거려 보나 젼혀 낯선 사람들뿐이라 어쩐지 마음이 휑해진다.

시장 따라 죽 정갈하게 차려진 온갖 식당 맛집들 다 들러보고 싶으나 미리 찾을 데를 정한 터라 일단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시장을 벗어났다.



망미동에서 열여섯 해를 살면서 두 아이는 소년기를 공부에 매진하며 보냈고 우리는 한창때인 삼사십 대를 별 굴곡 없이 유야무야 지냈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온 건 큰애 육 학년 때로 배산초등학교를 잠시 다녔고 터울 많은 딸은 여기서 입학을 했다.

그런만치 배산학교는 아주 낯익은 곳이라 망미동을 찾았으니 초등학교부터 먼저 올라가 보았다.

학교 턱밑에 즐비하던 문방구점과 서점은 모두 다 폐쇄된 채 문 닫은 가게들, 요즘 애들은 대관절 학용품을 어디서 사는 걸까.


학용품과 문제집을 사던 학교 앞 문방구 다들 문을 닫았으나 학교 진입로 언덕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배산만은 의연스레 옛 그대로라 자못 기꺼웠다.

교문과 교사는 그대로이지만 코로나로 원격수업에 들어가 학교는 텅 비어있었고 운동장 옆에 나래관이라는 산뜻한 건물만 눈에 띄었다.

학교 정원에 하얀 샤프란 청초하게 피어있었고 좌우로 고층 아파트는 바짝 들어찼으며 뒷산인 배산만이 예전 그대로 푸르렀다.

초등학교 바로 위쪽에 아들이 다닌 남일고등학교가 있기에 언덕길 한달음에 올라갔다.


남일고 교정에서 바라보면 푸르른 광안리와 해운대가 한눈에 들고 마주 보이는 장산은 힘찬 정기로 우뚝 솟아있어 조망권도 매우 훌륭하다.

85년도에 개교한 신설학교라 열의 가득한 교사진들이 포진하고 있어 그때만 해도 대학진학률 높은 우수 학교로 교육열이 정평나 있었다.

학생들에게 새벽 별의 기상을 심어주고자 효성로라 새겨진 돌비를 세운 당시 박태현교장선생님은 기개 짱짱한 분이셨다.

우리가 결성한 학교 어머니 모임 이름이 그래서 효성회였고 그 이름으로 장학회를 이끌기도 했었다.

그 인연 외에도 남일학교는 매일 드나들다시피 했는데, 수질 좋은 자연수를 지역민들에게 제공했기에 약수 받으러 새벽마다 오르내렸다.


동백꽃 그늘에 샛노란 황매화 핀 언덕길을 내려와 이번엔 딸이 다닌 망미여중으로 향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주위에 아파트가 하도 들어차서 어디가 어딘지 아무래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주민을 만나 위치를 물어봤더니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다며 자진해서 앞장서 주었다.

걸으면서 그녀가 하는 말이, 여중에서 남녀공학으로 바뀐 게 제법 오래전 일로 학생수가 줄어 중학교는 거의 공학이 되었다고.

요리조리 한참을 걸어 저만치 학교 입구를 가리키자 그제사 언덕 위에 있는 학교위치가 가늠됐다.

남녀공학으로 바뀌었을지라도 교사 중앙에 붙은 교표가 예전 그대로라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한참 전 일이라도 눈에 익숙한 여중생 딸의 교복에 달려있던 뱃지였기 때문이다.

언덕 위의 배산도 골목길도 낡은 아파트도 다시 보니 새삼 다 그 시절을 그립게 한다.

배산 중턱이라 스산하게 바람은 불고 해는 뉘엿거리기에 운동장 한바퀴 돌고는 학교를 뒤로 했다.


망미동 통합병원 쪽은 고층아파트가 밀밀하게 들어섰으나 토곡 방향만은 점점 쇠락, 새로 생긴 건물이라고는 선관위 빌딩뿐이다.

세련된 대단지 고층 아파트촌과는 달리 그 동네 주위도 퍽 낙후된 채 납작한 집이며 길거리마저 우중충했다.

그래서일까, 애틋하고 애련한 심사 한참 동안 가시지 않았다.

하긴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도로를 누비는 42번 57번 노선버스 번호가 여전하더라는 것, 어찌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이십 년 세월 변함없이 같은 노선을 달리는 42번 그리고 57번 버스여, 너무너무 반갑구나.

지하철 역사 가까이에 있는 식당 한 곳이 신통하게도 예전 상호도 그대로 운영되고 있기에 언제이고 한번은 꼭 들려볼 참이다.

얼마나 신용 있게 식당을 운영했으면 그리고 얼마나 개미처럼 열심히 살았으면 여태껏 기사식당 이름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까 호기심 만발!


그 무엇보다 집에서 삼 분 거리에 위치한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 주변은 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했지만 오 분이면 가던 중고등학교까지 아직 건재해 우리들의 망미동 시대를 회억하게 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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