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Why? 어깨 들썩하며 두 손을 들어 올리기 딱 좋은 시추에이션이다. 만일 내 경우라도 전임자 시절의 사건과 관련 국회에 출석해 증언하라면 단호히 거부하겠다. 박영한 민정수석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항명인가, 원칙 고수인가를 놓고 설왕설래 하더니 어제는 그의 면직/해임의 차이를 주워 나르며 신이 나서 한마디씩 거든다. 역공작이라느니 모종의 시나리오라고도 오늘은 떠든다. 심지어 이십 수년전의 맥주병 사건을 물어다 놓고 조폭이라 몰아세운다. 프로필을 봐서 알겠지만 대검 강력부장에 공안출신 검사를 두고 조폭 운운하다니 아무리 찌라시 기사가 과장과 선동에 능하다 해도 옮길 걸 옮겨야지 한심무인지경이다. 더구나 여기 이역만리에서 대통령 탄핵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떠든다고 뭐 달라지는 일이 있던가? 오늘의 김영한은 그 검사가 아닌 시인 백석의 연인 자야 김영한 씨다.
위 사진은 얼마 전 한국에 나갔다 들른 박수근 전시회장과 성북동 고갯길에서 찍었다. 심우장과 간송미술관, 길상사의 한적한 정경도 담겼다. 여기 침묵의 그늘에서 그대를 맑히라/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그대 향기를 심으라/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이 글은 길상사 어느 오솔길 목판에 새겨진 선시다.
청운동 한 화랑에서 열리는 박수근전을 본 다음 우리는 성북동으로 곧장 넘어갔다. 한국의 부촌이자 각국 대사관저가 있는 그 동네에는 심우장- 수연산방- 간송미술관- 길상사가 성북동 고갯길을 끼고 지근거리에 모여들 있다. 운 좋게도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특별전도 구경하고, 만해 한용운선생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에서는 감나무도 쳐다보며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모국방문 차 한국에 나가 서울에 머물 시간이 있는 분들이라면 필히 둘러보길 권하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성북동길이다.
성북동에서 끝으로 들른 곳이 길상사.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이 사찰은 삼각산 남쪽 성북동 고갯길에 있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이 사찰은 원래 대원각으로 국내 3대 고급요정인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급 요정이었다. 대원각 주인인 김영한 씨가 불가에 시주하므로 요정은 길상사라는 사찰로 다시 태어난다. 요정의 변신치고는 뜻밖인 사찰, 그 역시 시절인연에 따른 소이이리라. 당시 시가 1천억 원에 달하는 이 막대한 재산을 송광사에 시주했는데 이는 그녀가 법정스님의 <무소유> 책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라 한다. 대원각을 처음엔 법정 스님께 시주하려 뜻을 밝혔지만 스님은 십 년이 지나도록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한다. 결국 법정스님과 무관하게 송광사에 기증,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여 길상사가 되었다. 1996년 대원각은 기존 건물을 개보수, 명소 사찰인 길상사로 자리 잡는다.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의 러브스토리야 진작부터 잘 알려져 있다. 시인 백석에 대한 자야의 순애보도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은 백석의 옛 연인이다. 젊은 시절,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던 백석은 회식자리에서 만난 기생 김영한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만 치르고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그녀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아는 그녀가 응하지 않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혼자 떠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둘은 전쟁과 분단으로 그렇게 영영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김영한은 백석을 잊지 못하고 그의 생일인 7월 1일마다 금식을 하면서 그를 기렸다고.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 원을 들여 연인 백석을 기리는 "백석문학상"을 재정하고 같은 해에 대원각을 불가에 시주한다. 그의 보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1999년 KAIST에 그녀의 유언장이 도착한다. 국가과학기술 영재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 원이 넘는 김영한 여사 소유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한 것.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나라가 부디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잔여재산을 전달한 것이다.
대원각을 시주할 때 천억이 아깝지 않더냐는 기자 질문에 "백천억도 백석시인의 시 한 줄만 못하다" 했다는 그녀. 김영한은 1999년 눈을 감았다. 월북시인이 아니라 재북(在北) 시인이었던 백석은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5년 작고할 때까지 33년 동안 붓을 꺾고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남쪽의 자야 씨가 그토록 간절하게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살다 갔다는 것은 비극일까 아닐까. 시인 백석은 분단 상태에서 거의 50년간 잊혀진 이름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월북시인이 아니다. 광복 후 월남하지 않고 고향인 평북 정주에 남았을 뿐이다. 자유롭고 모던한 시인이었으니 북한체제에 적응될 리 만무. 결국 협동농장으로 밀려나 이름없이 살다가 1996년 작고했다. 1962년 북한 문단에서 사라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30년이 넘는 세월, 북한에서도 오지로 손꼽는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에서 농사꾼으로 살다 간 그의 생애 후반부는 ‘?’인 상태로 미궁에 놓여 있다. 북한 작가들을 만나 넌지시 백석에 대해 물으면 다들 천편일률적으로 ‘말년에 전원생활하다 돌아가셨습네다’ 란 말만 한단다. 삶의 공백기는 분단의 그림자가 거두어진 다음 차차로 풀어야 할 과제. 대한민국에서 그는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후 단숨에 한국현대시의 중심에 섰다.
이런 밤엔, 마음도 산책을 하듯 자꾸만 먼 길을 나섭니다. 그곳은 지금, 어떤 바람이 불까요? 이는 자야(子夜)가 백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시서화에 능했다던 그녀 박영한, 백석이 붙여준 아호는 자야, 권번의 이름은 진향이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