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신록 숲의 아카시아 향기를 아는가. 혹은 과수원 둘러싼 아카시아 생울타리나 사태진 산허리에 조림된 울울한 아카시아 숲의 무성함을 보았는가.
산야에 자라는 나무 치고 아카시아만큼 은총 큰 나무도 없으리라 여겨진다. 우선 왕성한 생명력이 그러하고 주렴이듯 피어나는 꽃이 그러하며 거기에 고혹적인 향기조차 부여받은 아카시아는 분명 행운목이다.
아카시아는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야산 박토나 비탈진 응달에도 원기 하늘을 찌를 듯 쭉쭉 자란다. 어느 땅에든 씨를 묻으면 힘차게 뿌리내리는 아카시아. 이웃을 차별하지 않고 그 언저리에 수수한 풀꽃을 키우는가 하면 줄기로는 까치집을 받들어 안고 있다.
한때, 경제 수림으로 선택받아 헐벗은 산을 푸르게 가꾼 적도 있다.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 빠른 성장률 때문이다. 또한 병충해에 강하고 그 목재는 단단하여 철도 침목으로 쓰인다고 들었다. 뿐이랴. 아카시아는 꽃에선 좋은 꿀을 얻고 잎은 사료로 사용된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토끼 주려고 바구니 끼고 아카시아 잎 훑으러 다닌 기억쯤 간직했으리라. 아니면 아카시아 잎자루 떼서 '가위바위보'놀이하며 하나씩 잎을 따던 추억 같은 거라도.
아카시아는 환경 가림 없이 아무렇게나 자라는 나무치고 꽃이 정말 대단하다. 잎보다 먼저 송이송이 소담스러운 꽃을 피워내는 아카시아꽃의 향기라니. 그것은 정인(情人)에의 그리움이듯 가까이에서보다 멀리 있음에 더욱 그윽하다. 바람결에 언뜻 실려오는 아카시아 향기는 늘상 뻐꾸기 소리를 함께 데리고 온다.
설화(雪花) 맺히듯, 구름 머문 듯 하얀 꽃무리에 달콤한 향기. 그 오월이 가면 싱그런 신록 그리고 짙푸른 녹음 그늘. 이 모든 축복에 비해 단 한 가지 약한 곳이 있다. 아카시아의 아킬레스건은 옅은 뿌리다. 역시 신은 공평하신 분이셨다. 하긴 때론 그 지나친 활착력으로 곁에 선 나무로부터 눈총도 받았으리라. 그러면서도 넓고 깊게 자리 잡지 못한 뿌리.
태풍 뒤 산기슭에 패잔병처럼 자로 모로 쓰러진 것은 아카시아다. 실속 없이 키만 우뚝한 채 큰 둥치에 비해 보잘것없는 뿌리 탓이다. 항거의 몸짓이듯 날카로운 가시를 지녔음에도 저항 대신 순순히 항복하는 백기만을 준비한 아카시아. 지심 깊이 내리지 못한 뿌리로 해서 여느 나무보다 바람에 약한 아카시아는 어쩌면 또 다른 내 모습이 아닐까.
새삼 내 자리, 내 발치를 더듬어 본다. 혼탁한 욕망과 메마른 갈증과 부질없는 안간힘만이 아카시아 가지처럼 솟구친 나. 아무것도 채운 게 없다. 견고히 다져진 내실 같은 건 더더구나 없이 가당찮은 허명(虛名)만이 뿌리를 이룬 나. 아카시아꽃향기 비슷한 것이라도 지닌 게 있었던가.
글을 쓴다는 것. 어떤 이는 생명으로 쓰리라. 글 쓰는 그 자체가 전 생명의 연소이리라. 또 누군가는 생활 그 자체로 쓰는 이도 있으리라. 때로는 하나의 액세서리로 쓰는 이마저 있다는데. 나는 단지 좋아서 쓴다고 했다. 그것이 정직한 답일까. 혼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카시아처럼 무성한 나무 그늘도, 향기로운 꽃도, 듬직한 줄기도 지닌 바 없는 나는 아무래도 아카시아 뿌리만 닮았나 보다. <87. 5.>
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