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온 세상이 부옇다.
진종일 비 같은 게 부슬거리는데 우산 쓴 이는 안 보인다.
이슬비도 가랑비도 보슬비도 아닌 는개다.
는개는 비라고 부르기도 뭣할 정도로 대기나 습습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안개 방울이 굵어지면 아래로 쳐지기에 ‘늘어진 안개’에서 줄인 이름이라는 는개.
사월마다 제주엔 고사리 장마가 든다더니 퍼붓는 장대비 대신 초목 깨어나라 다독거리며 내리는 비인가 보다.
실제로 지금은 한창 고사리철.
점점 사월 깊어갈수록 숱하게도 고물고물 솟구치며 굵어지는 대궁, 고사리철다운 기상도다.
고사리 채취, 어쩌다 두서너 번은 재미지나 몇 시간 계속 허리를 구부렸다 펴는 일이 보통 노역 아니었다.
억척 할망 아픈 허리 잠시 펴볼 짬도 없이 내동 엎드려 신들린 듯 일일이 꺾어 담는 고사리.
할망들 고사리앞치마 수북해지는 만큼 통증 클리닉에 갖다 바치는 돈 정비례하련만 아랑곳하지 않고설랑.
만일 이 황금 같은 봄 한철 고사리 채취 일삼아하라면?
나 정도 억척으론 체력으로 보나 따나 물론 불감당, 제주 여인네들 강인한 생활력에 두 손 번쩍 들었다.
지척 가늠 안 되게 안개 자욱한 이 날도 한라산 어느 기슭 키 돋워가는 새밭에서 고사리들 꺾고 있으리라.
이처럼 날씨 꾸물거리며 선득한 저녁엔 복국이 생각난다.
미 동부에 살 때도 이런 날이면 엄청 복국이 먹고 싶었다.
뉴욕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살던 체리힐엔 복국집이 없었다.
으슬으슬 몸살 기운이라도 들라치면 아쉬운 대로 생태탕이나 월남국수로 땜빵하곤 했다.
어쩌다 딸내미 보러 LA나 가야 복국 그 시원한 국물을 맛볼 수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뒤 계절 없이 비 오는 날이면 한동안 복국 꽤나 먹으러 다녔다. 포원 진 걸 만회할 양으로.
서귀포에 와선 별식이 하도 많아 굳이 찾지 않았던 복국, 우연한 기회에 이 식당을 알게 됐다.
이후 혼자서라도 출출 비 오는 날이면 뜨끈하고 시원한 맛에 복국을 먹으러 온다.
숙취엔 복국이라지만 속풀이가 필요한 주당도 아니면서 맛 깔끔하고 개운한 복지리를 좋아하니까.
전에 신문사 근무 시 접해 본 복수육과 히레사케, 솔직히 내돈내산이라면 전혀 내키지 않겠다만.
특별한 계층의 미식가나 겁 없이 법카 찍찍 긋는 경우가 아니라면 예약 필수인 정통 코스요리는 넘사벽.
특별한 인연으로 초대된 이 복국집에 처음 와서 걸게 대접받던 날.
어렵거나 불편한 자리는 아니지만 일단 난생처음 접하는 상차림이라 어쩐지 조심스러워 젓가락질 자연스럽지 않았다.
물론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늘 버릇처럼 하는 사진 찍어대기도 저어 됐다.
서귀항 인근 부두로에 위치한 향원복집은 반세기 넘는 역사에다 법조계나 정계, 예술계의 인사들이 찾는 명소이자 '백 년 가게’에 선정된 복요리 전문점이다.
단골의 면면으로도 신뢰할만한 맛을 갖춘 복집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메뉴 역시 특화된 복사시미를 비롯, 모둠회 샤부샤부 수육 복튀김 생복탕 등이 있다.
담백한 그러나 오지게 비싼 복사시미,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 일품인 가와 무침, 쫀득하면서도 과자같이 고소한 복 튀김뿐인가.
넝큼 집어 들어 접시 균형 허물면 송구스럴 거 같은 복초밥과 복타다끼, 정갈한 맛에 반한 복 샤부샤부, 지리탕과 죽도 술술 목 넘김이 좋았다.
그 무엇보다 청화백자 접시 바닥 투명히 얼비치며 꽃처럼 피어난 복사시미는 거의 예술이었다.
탱글한 횟감 이전에 그윽이 한참도록 눈으로만 즐겨도 멋져, 내심 감탄부호 연신 찍었다.
보통 회를 먹듯 주섬주섬 먹기에는 습자 종잇장보다 얇으레 한 살점들에게 괜스레 황송스럽고 미안쩍기조차 했다.
잔술로도 주문하는 쌉싸래한 히레사케가 도자 주전자 째로 두 번 들어왔다.
단세포적인 내 머리로는 도무지 계산 합계가 나오지도 않았다.
하긴 내 지갑 열 일은 아니었으니 아무튼.
이후 비 습습히 젖는 날이면 혼자라도 흔연스레 찾아와 참복지리를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