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꽃 향기 미풍에 날리고

by 무량화
탱자꽃
찔레꽃
돈나무꽃


외돌개로 가는 돔베낭골에 접어드는데 바람 갈피에서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향기의 흐름을 좇다 보니 어느 집 울 안에 핀 탱자나무 꽃이었다.

귀양처에서 위리안치 형을 산 추사 선생 처소가 퍼뜩 생각났다.

날씨 꾸무레해 며칠 집에만 있었기에 갑갑하던 차, 대정에 있는 선생의 유배지로 방향을 틀었다.

빙 둘러선 탱자나무 울타리엔 새로 돋아난 겨자색 눈엽이 윤기로웠다.

잎새는 물론 가시까지도 새순은 매우 연하고도 보드라운 게 꼭 햇병아리처럼 야리야리했다.

당연히 탱자꽃 하얗게 피었으리라 여기고 왔는데 꽃은 흔적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지난겨울부터 열린 특별전 전시가 계속되고 있는 추사 전시관에 들어갔다.

입구 안내센터 유리창으로도 탱자나무가 보이기에 어느새 탱자꽃이 다 져버렸냐고 물어봤다.

올해는 이상하게 해거리를 하는지 꽃 핀 걸 아직 못 봤다고 했다.

들어온 김에 전시실 한 번 더 돌아보고 붓글씨 체험실에서 손글씨 써 추사 선생 낙관도 눌러 갖고 나왔다.



전처럼 무한정 쏘다니는 대신, 나온 김에 요새 한창인 귤꽃을 만나보기로 했다.

대정 들판엔 마늘밭만 질펀한 게 아니라 청보리밭 물결치고 있었다.

귤꽃보다 먼저 반기는 꽃은 돈나무꽃과 짤레꽃이었다.

둘 다 신록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하얀 색깔의 꽃이다.

곧이어 달큼한 인동초꽃도 보얗게 피어나리라.

두어 그루 하귤이 담 너머로 휘늘어진 정경 고와서 까치발 들고 사진 찍는 중이었다.

채마밭을 매던 쥔장 할머니가 안에 들어와 찍으란다.

하귤은 꽃을 피우고도 크고 노란 열매 주렁주렁, 볼수록 신기하고도 신통스럽다.

귤꽃을 찍은 후 고맙단 인사하고 나오려는데 큼다막한 하귤 세 개를 툭툭 따서 봉투에 넣어주셨다.

서귀포에 살면서 수차 느꼈지만, 여긴 아직도 예전 시골 노인네 넉넉한 인심이 연면히 살아있다.

대정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문 활짝 열린 감귤농원이 즐비했다.

두어 곳 농장에서 한창 제철 맞은 귤꽃 사진 찍으며 귤꽃향에 함빡 취해들었다.


귤밭에 귤꽃 그득 피어나 새하얀 그 향기 넘치고 또 넘쳐나니, 꽃향기 맡으며 문득 말의 향기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귤꽃향 표현조차 엉성하기만 하기에.

치자꽃 향처럼 향긋하면서도 그지없이 청신한 치자꽃 내음보다는 더 달짝지근한 향기 사방에 퍼뜨리는 귤꽃의 독특한 향이라니.

꽃송이 조밀하게 다닥다닥 붙었는 데다 어느 꽃은 이미 꽃잎 져 성냥머리만 한 애기귤을 매달고 있었다.

미풍에 날리는 귤꽃 향기와 더불어 여유로이 즐긴 오늘의 소풍놀이.


한껏 느긋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마당귀에 바람을 놓고

귤꽃 흐드러져

하얀 날


파도소리 들으며 긴 편지를 쓴다 "

​서귀포에서 나고 묻힌 한 시인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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