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의대 증원 발표는 14개월 만에 원점으로 회귀했다.
정부가 드디어 "2026학년도 의대 모집인원을 증원 전인 2024학년도 정원(3058명)과 동일하게 변경하겠다"고 발표했다.
뜬금없이 내지른 의대 증원 2천 명이라는 숫자는 귀신에 홀리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비상식적 행태였다.
지식만을 주입식으로 전달하는 교육형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의대교육임은 누구나 아는 바다.
장기간의 실기실습이 따르는 특별전문분야라는 걸 묵살하고 철저한 후속 대책도 없이 무작정 밀어붙인 만용이라니.
그 결과 의학계 전반은 파행의 소용돌이에 휩싸였 으며 집권당의 총선 참패라는 원인제공은 물론 앞으로 26학년도 대입 응시생들의 혼란은 또 어쩔 것인가.
의대 광풍이 불며 휘몰아쳤던 과탐런의 블랙홀에서 벌써 사탐런으로 갈아탄 준비생들이 늘었다는 학원가다.
한 국가의 리더 역할이야말로 상상 이상으로 막중하다는 걸 뼈저리게 인식하는 계기를 전 국민이 직접 맞닥뜨려 봤으니 이제 우리 국민들이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차례.
6월 3일의 현명한 선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오늘 주제는 한국 최초의 병원이다.
한국 땅에 처음으로 근대병원이 문을 연 것은 부산 관립 제생병원(현 부산의료원)이 효시다. 1876년 식민지에다 일본 군대가 운영했던 병원이다 보니 9년이나 앞서 세워졌어도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일까. 그보다 훗날인 1885년 서양 의사에 의해 차려진 병원을 첫 번째로 친다. 바로 저 한옥 기와집에 개원한 제중원 (광혜원이던 첫 이름은 보름 만에 제중원으로 개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고 배웠다.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1881년, 고종은 신사 유람단이라는 시찰단과 영선사라는 사신단을 각각 일본과 청나라로 보냈다. 외국의 발달한 문물과 새로운 제도 등을 둘러보고 오라는 뜻이었다. 두 사절단은 서양과 일본, 중국의 위력적인 문물을 접하자 크게 놀랐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던 조선이었기에 발달된 과학 문물과 제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은 우리나라 개화정책 추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선사는 청나라로 가서 톈진 기기창에서 무기 제조기술을 배워 조선 최초의 신식 무기 제조창인 기기창을 설립하는 데 큰 몫을 했다.
1884년, 우정국 축하연에서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명성황후 조카로 왕실의 총애를 받던 민영익이 개화파의 피격을 받아 큰 상처를 입었다. 그날 저녁, 조선에서 외교고문으로 근무하던 독일인 묄렌돌프는 개화파로부터 심각한 자상(刺傷)을 입은 민영익을 등에 업고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민영익의 상태가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위중한 가운데, 미국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던 선교사 알렌이 한겨울 밤 불려 왔다. 알렌은 칼에 맞은 상처에 봉합술을 시행하여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일 이후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을 열고 싶다는 특청을 올렸다. 마침 조선 왕실에서도 나름대로 개화를 추진하던 시점이라 서양식 병원 개원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로는 그 비용조차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이때 알렌이 장소만 제공해 주면 보수를 받지 않고 진료를 하겠다 하니 조선 정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885년 4월 10일, 은혜를 널리 베푼다는 뜻의 광혜원(廣惠院)이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병원이 개원을 한 것이다. 조선 왕실이 내어준 공간은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정변이 실패하며 반역 죄인이 된 홍영식의 자택이었다. 600평이나 되는 규모 큰 이곳은 40 병상 수준의 병실과 하루에 외래환자 100명을 치료할 정도의 시설을 갖출만한 자리였다.
광혜원은 2주 만에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이는 <논어>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서 따온 말로 ‘널리 베풀어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설립된 최초의 의료시설이었던 혜민서(惠民署)가 1882년에 재정상의 문제로 문을 닫은 이후, 제중원은 민초들을 위한 유일한 의료기관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닥터 알렌을 비롯한 제중원의 의사들은 하루에 200명가량을 진료해야 할 정도로 경황없이 바빴다.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양반뿐 아니라 걸인이나 나병 환자 등, 종래 천대받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녀과가 신설되면서 여성만을 위한 진료도 이루어졌다.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피부병이나 백내장 등 한눈에 증세가 보이는 질병들이 많아, 환부를 보여주면 그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처치를 할 수 있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양식 치료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켰고, 아주 소액의 약 값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료였기에 누구든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은 제중원으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단순히 코쟁이 서양 의사가 신기해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까지 많이 찾아와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140년 전인 1885년 4월 10일을 기림은, 서양 의학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시술된 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중원을 통해, 조선 왕실이 가난한 민생들을 긍휼히 여겨 만든 첫 치료기관이었던 혜민서의 정신에 더해, 만민평등과 박애의 기독교 정신이 만나게 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한 까닭이다.
알렌은 병원을 만들겠다는 기획서를 제출하면서 이 밖에도 나중에 젊은 학생들을 뽑아서 의학을 가르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하여 1886년에 제중원의학당을 세워 선발된 학생들에게 의학 교육을 시작했고, 당시 선교사 언더우드는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다. 허나 이때 교육받은 학생들 중에 의사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인 데다 개화 초기이다 보니 장기간에 걸친 의학 공부보다 약간의 영어만 할 줄 알아도 출세할 수 있었던 세월이었다. 따라서 영어와 의술을 둘 다 익혀야 하는 의사의 길을 굳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드디어 1908년, 제중원의학교에서 수년간의 의학 교육을 마친 일곱 명의 학생들을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의사면허를 부여받은 정식 의사이자, 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자가 이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알렌의 뒤를 이어 의료선교사로 부임한 닥터 죤 헤론은 제중원에서 오 년 후 병사했는데, 그는 한국 근대화를 위해 애쓴 외국인을 위해 제공된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힌 첫 번째 외국인이 되었다.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이는 한강 옆 양화진에 있는 어느 선교사의 묘비명이다.
미국에 사는 교민 중에도 고난도의 암 수술을 위해 귀국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는 다년간 임상으로 쌓은 높은 수준의 의료 기술을 신뢰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의사소통이 자유롭다는 이점도 작용할 터다. 요즘엔 의료관광으로 이루어지는 건강 검진 역시 많이들 선호하는 편이다.
그 외에도 한국을 찾는 외국인 환자 수가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국제진료를 이미 국가 주력사업으로 시행하고 있는 싱가포르만이 아니라 의료 선진국들도 외국인 환자 유치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판. 의료수준이 높다고 알려진 한국도 해외 홍보를 통해 중증(重症) 환자 유치에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환자를 위해 여러 진료과가 협진하거나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전문 분야별 특성화 진료센터를 운영하는 등, 신속하고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의료환경이라는 최대 장점을 충분히 살리면 좋을 것이다. 이제 한국은 의료 인력의 기술, 의료 서비스의 질, 의료기관 수준 모두 상당한 수준에 와 있다. 아직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의료국에는 못 미치지만, 전 국민을 카버 하는 의료보험 시스템과 질 높은 의료 서비스 대비 낮은 의료비용으로 한국의 의료경쟁력이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의 의료 수준이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첫째 이유는 한국 의사의 우수성과 전문성에 더해 한국인 특유의 섬세함에 따른 수술의 정확도를 들 수 있다. 최고 두뇌들이 의대로 진학한다는 점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젓가락으로 콩을 집어먹을 수 있는 민족은 한국인이 유일하다. 둘째로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고 전문적인 검사가 그것도 한 병원에서 모두 가능하다는 점이다. 중한 질환으로 병원에 가보면, 각종 검사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숙련된 의사가 빨리 판단해 치료 결정을 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실제 여러 이유로 검사 및 치료 결정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국가들이 많은 게 현실로 미국도 물론 그러하다. 기본적인 피검사 결과치도 한 달 후에야 받아봤으니까.
단순히 의사와 의료장비만으로는 일류 병원을 만들 수는 없다. 의료 서비스를 둘러싼 다양한 정책과 시스템이 병원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다. 이에 더해 ‘한국의료의 브랜드 이미지’를 체계적으로 만들어 홍보하는 일도 병행시켜야 한다. 국제 네트워크를 늘려 다양한 국제 학술행사를 통해 한국 의료의 우수성을 알리고, 의료 저개발 국가 의사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며 장·단기 연수를 통해 선진 의료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겠다.
이미 십년 전에도 한국의료 서비스 만족도는 4점 만점에 3.59점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의사 간호사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았으며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 전문성과 신속성 및 특급호텔 수준의 고품격 병원 시설과 청결도 등을 긍정적으로 꼽았고 의사소통 문제와 접근성을 단점으로 들었다.
의술 위에 인술이 있다고 하였다. 질병의 고통을 겪는 환우들의 심정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똑같다. 상태, 신분, 국적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따뜻하게 성심성의껏 최선 다해 돌보는 마음 자세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의사의 기본 자질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대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전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 그들이다. 인종, 종교,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참다운 의사의 길을 걷는 양심적인 의료인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최초의 병원이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만큼 우리가 받은 사랑의 의술을, 지금은 어려운 이웃 나라들과 나누며 살고 있다. 다큐 영화 '울지 마 톤즈'로 잘 알려지다시피 이태석 신부가 수단에서 펼친 봉사, 그 밖에도 질병으로 고통받는 지구촌의 낙후된 지역 사람들을 의술로 보듬는 의료봉사 팀도 다수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저개발국의 난치성 환자들을 국내에서 무상치료해 주며 사랑 나눔의 인술을 실천하는 병원도 여럿이다. 히말라야 등정을 돕는 셰르파를 위한 병원이 한인 등반대의 노력으로 네팔에 세워진다는 뉴스도 들었다.
근자엔 러시아, 중동, 중국 등으로 진출하는 의료기관이 늘고 있다. 그중에도 거대한 의료시장과 정부의 의료 서비스 개방정책, 지리적 근접성이 좋은 중국을 특히 선호한다. 인구 1000명 당 의사, 간호사 수가 각각 1.5명, 1.7명으로 우리나라 의사 2.2명, 간호사10명에 비해 열악하다는 중국이다. 중국 역시 식생활 변화와 노령화, 국민의료비 증가 등이 나타나 질 높은 의료시스템에 대한 수요가 많은 나라다. 여기에 세브란스병원이 검진센터나 전문병원을 제외한 대형 종합병원급 규모로는 국내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다고 들었다. 의료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국 내 성장 잠재력은 앞으로 무궁무진하다니 기대가 크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근대병원이 문을 연 지 백 오십 년. 최초의 의료시설인 제중원과 오늘날의 서울대병원, 아산 삼성병원 등 대형병원의 위용만 봐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외형만을 자랑할 게 아니라 오래도록 수혜국이었던 우리도 이제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열악한 의료환경에 놓인 나라를 돕는 시혜국이 되기를. 나아가 한국의 국제의료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한국 의술이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며칠 전 군의관 후보생 대상 강연에서 외상외과의 이국종교수가 말했다. 내 인생은 망했지만 후배들은 바이탈 과는 하지 말라는 소리가 왜 나왔을까. "조선반도는 입만 터는 문과넘들이 해 먹는 나라다. 이게 수천 년간 이어진 조선반도의 DNA고 이건 바뀌지 않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며 오죽하면 탈조선을 권했을까를 생각하면 짠하다. 알아서 다들 기를 쓰고 몰려드는 이른바 빅5병원. 전공의 짜내서 대리석 벽에다 통유리 바르고 에스컬레이터 만드는 대형병원들은 어차피 환자가 밀리니 인테리어에 힘 쏟지 말란다.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 이 같은 거친 쓴소리 나올만한 현 실정이다. 사명에 입각해 본분에 충실한 의사만을 요구하기 이전,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격적 존중이 따를 때 인술을 펴는 참의사도 당연히 늘어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