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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7. 2024

게티 씨는 언제 행복했을까

오래전 만추, 아산 현충원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일행은 인근에 있는 맹 씨 행단(孟氏杏壇)을 찾았다. 조선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인 맹사성(孟思誠) 고택(古宅) 앞. 육백 년 생 은행나무를 보호하려고 단(壇)을 쌓았대서 맹 씨 행단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창창한 가을 하늘에 대비 이룬 샛노란 은행나무 세 그루가 바람이 불적마다 우수수 나뭇잎을 쏟아내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감탄사가 터짐과 동시에 신라금관이 떠올랐다. 신목(神木)을 본뜬 출자(出子) 모양의 나뭇가지에 곡옥(曲玉)의 영락이 한들거리는 고고하고도 화려한 신라금관.



게리 빌라에서 그 가을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보석과 장신구가 전시된 공간에서다. 반지나 팔찌 귀걸이 등속보다 유독 눈길을 사로잡던 황금관. 순금판을 오려서 만든 월계수 잎을 가지에 둥글게 엮어 만들었다. 정밀한 세공 기술이나 디자인은 신라금관에 미치지 못했다. 허나 그 이전, 월계관은 승자와 영웅이나 천재의 머리에 씌워지는 관이 아니던가. 그리스의 계관시인, 개선장군, 올림픽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월계관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월계수는 아폴로 신에 바쳐지는 나무였다니 바로 신목 아니랴. 여러모로 의미 깊은 황금 신목 월계관의 원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소장품 중 월계관만은 어쩐지 게티 씨도 가끔은 머리에 얹어보았음직하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도 넉히 그러했을 것 같은데...  

Mummy? 이게 뭥미? 둘러보기 우선순위대로 먼저 설명문을 훑는다. 이크! 낯선 단어 등장에 주눅부터 들어 즉각 순서를 바꾸기로 한다. 언뜻 눈짐작만으로도 충분히 가늠되는 미라다, 내심 께름칙하지만 일단 전시물 상하좌우를 훑으며 꼼꼼히 살핀다. 머리 쪽에 그려진 얼굴을 보니 월계관을 쓴 장년의 남자다. 삼베로 두툼히 싸인 발치에 이름이 휘갈겨져 있다. 영정 사진이 대개 그러하듯 한창 좋은 시절의 헤라클레이데스인 모양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철학자로 플라톤 문하에서 아카데미아를 운영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구가 24시간을 주기로 자전하며, 수성과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그다. 달변으로 코스모스를 논했음에도 미쳐 자신의 사후는 챙기지 못해 어처구니없는 혼돈 상황에 처하고 만 장본인 맞나? 헌헌장부까지는 아닌 중키의 남자가 시공을 한달음에 건너뛰어 와서는 미서부 한 빌라 안에 쓰러진 장승처럼 맥없이 누워있다. 아득한 B.C 연대에 죽어 명부에 간 망자를 대명천지로 다시 불러내 눈부신 조명 아래 눕혀 놓았건만 그는 태연스럽다. 내생을 기약하는 아니 환생을 기대하는 오색 그림으로 전신이 감싸인 그리스 미라가 문득 제행무상을 일깨운다.



알프스 빙하에서 되살아난 원시시대 얼음 인간 '외치'나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깨어나 미라의 저주로 불리는 '투탕카멘'. 고고학이나 과학 연구 자료라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한번 죽은 자는 흙이 되어야 그 자신은 아무래도 편안하겠다. 한 생애 마감하고 눈 감으면 한 줌 재로, 자연의 일부 되어 흙으로 회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득한 세월 저편에서 현대로 끌려 나온 미라. 뭇 호기심에 노출된 채 유리관에 겹으로 싸여있는 미라가 괜히 측은스럽다. 죽은 자를 어떤 형태로든 지상에 다시 불러들임은 망자를 욕되게 하는 일,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즉시 그대로 영영 지상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도 싶다. 이승 등진 넋이 구천을 떠돌며, 남겨진 허울에 연연케 해서는 도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미라에 이어 꼼꼼스런 부조로 사방이 꾸며진 대리석 새하얀 관을 둘러본다. 인솔 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학생들은 바짝 다가서서 살아 움직일 듯 역동적인 조각을 감상하고 있다. 실제감이 드는 양각의 악사 둘레에 엉긴 남정네들은 춤을 춘다. 방패와 무기를 든  전투 현장. 배를 떼밀거나 노를 젓는 이들은 노예일까. 입체 조각이 빙 둘러 나있는 기다란 대리석 관 앞이다. ㅉㅉ..... 본디 주인은 어디다 팽개치고 우두커니 빈 관 되어 쑥스러운 구경거리로 나앉았나. 아킬레스의 생애가 새겨진 대리석 관 앞에도 일단의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다. 수확기의 포도원 풍경이 양각된 관 앞에 서기까지는 오래 기다렸다. 오동통한 소년들 한패가 사다리를 타고 포도를 연신 따 나른다. 포도확에서는 손에 손잡은 아해들이 부지런히 포도알을 발로 으깨 포도즙을 만들어 낸다. 석관의 임자는 장원의 영주였을까,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처리한 재치가 슬몃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리스를 떠나게 된 육중한 석관조차 이 자리에 오기까지 몇 손을 거치고 몇 다리를 건너는 우여곡절을 겪었을 터, 왠지 씁쓸하다.



게티 씨는 언제 행복했을까. 나다니엘 호손이 말하길 "행복은 나비와 같다. 잡으려 하면 항상 달아나지만, 조용히 앉아 있으면 스스로 그대 어깨에 내려와 앉는다."처럼 게티 씨도 마침내는 그러했을 것 같다.

그는 법률가이면서 성공한 석유 사업가였던 조지 프랭클린 게티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 명문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그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유정개발 사업에 투신, 이십 대 초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다. 대공황기에도 그는 과감한 주식투자로 성공 가도를 치달린다. 석유기업 외에 광산업, 호텔업, 비행기 제조회사까지 인수해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2차 대전 이후 중동지역에서 석유 채굴권을 확보하면서 목돈을 벌어, 1957년도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제일의 부호로 등재된다.  



반면 사생활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불신임과 갈등, 어머니와는 유산을 두고 모자간에 극심한 분쟁을 벌였다. 괴팍스럽기로 소문난 그는 다섯 번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허나, 자신의 후계자 될만한 재목이 없다고 탄하며 자녀들을 길들이느라 수없이 유서를 바꿔 써야 했던 폴 게티. 장남은 요절했으며 차남은 영화에 몰두했다. 셋째는 영국에 칩거 중이었고 넷째는 음악에 빠져있었다. 재벌가의 곪은 속내는 어느 나라 사정이나 비슷한가. 가족들은 불화했으며 자손들은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 일쑤였으므로, 그는 멀찌감치 영국에 나가 살며 가족들과 소원하게 지냈다.



대신 영국의 영지에 은거하며 편집증에 가까이 예술품 수집에 매달린 그. 엄청난 양의 역사적 유물과 미술품을 소장하므로 그네들과 날마다 대화 나누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애정을 쏟으면 하긴 무생물인 돌도 말을 걸어온다고 하였다. '돈이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라고 누누이 말했다는 게티. 생전에 우려했던 대로 결국 사후 8년 만에 그가 일군 거대 기업은 텍사코로 넘어간다. 그 와중에 전부인들과 자식들은 재산을 두고 소송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게티의 유산 대부분은 폴 게티 트러스트 소유가 되어 있었으므로 워낙 탄탄한 그 기초 덕에 안정적인 미술재단으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다. 게티의 기업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시켜 주고 있다. 게티 빌라와 게티 뮤지엄은 엔젤레노스의 정신적 휴식처로 자리매김되면서 그 이름을 위대한 컬렉터로 각인시켜 주었다.



가진 자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게티는 문화적인 면에서 무미건조한 로스앤젤레스를 문화도시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예술 후원자다. 성격은 다르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를 뒷받침해 피렌체에 문화예술을 활짝 꽃 피우게 한 메디치 가문도 역사에 기록된 예술 후원자였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이 아니라도 예향 피렌체 도처에서 실제 그의 자취와 만날 수 있었다. 스페인의 성가족 성당을 지은 가우디는 구엘 백작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 재벌들이 문화 재단을 만드는 속셈은 상속세를 피하려는 편법의 하나라 눈총을 받는다. 반면 한국에도 청십자병원의 장기려 박사와 유한양행을 만든 유일한 박사 같은 존경스러운 분들은, 재능과 재산을 사회에 오롯이 환원한 보기 드문 어른들이었다.



곁길로 샌 화제를 다시 게티 씨에게로 돌린다. 태평양을 눈앞에 펼쳐둔 게리 빌라 대저택 소유주였던 게티 씨. 그는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낀 때가 과연 언제였을까. 행복에 대한 정의는 각자 가치관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므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행복에 대한 정의는 없을 터.  단지, 근사한 사회적 조건이나 물질의 풍요로움은 세속적인 욕구들은 채워줄지언정 정신적 행복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참행복감은 자신이 즐기고 원하는 일에 심취해 무언가를 이뤄낼 때 드는 만족감 아닐지. 나아가 스스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자각이 들 때 느껴지는 게 아닐는지. 특히 지적 만족감이 주는 포만한 행복은 느껴본 자만이 아는 것.  




게티 씨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기는 정신없이 떼돈이 굴러들어 오던 때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미녀들과 주지육림 속을 헤매며 향락에 빠졌던 시절도 물론 아니었으리라. 또는 원하던 미술품을 하나하나 소유해 나가는 기쁨으로 흥분하던 순간들, 반면 귀한 예술품을 수중에 넣은 만족감은 그때뿐이고 더 나은 것을 갈망하게 만들면서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켠 듯 끝없는 갈증에 목이 탈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늘어나는 미술품의 양에 비례하여 점점 고양돼 가는 정신세계를 느낄 때 그의 영혼은 충만한 행복감을 누렸으리라.



"미술품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의 희망과 분노와 그 작품들이 탄생되었던 시대와 장소를 반영한다. 미술작품보다 더 매혹적이고 풍요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게티의 평소 인식이 묻어나는 발언이다. 더구나 궁극엔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미술품 컬렉션의 결과로 그는 두루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내면의 행복이 참 행복 임도 깨달았으리라. 지닌 재산을 자신이나 가족만을 위해 쓰는 것에서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예술을 향유하며 문화생활을 확장시켜 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때라면 누군들 행복을 느끼지 않겠는가. 어떤 형식이든 봉사활동을 하고 나면 뿌듯해지는 기분이 들며,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얻은 거 같다는 경험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행복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행복은 절대로 그 사람을 속이거나 피하지 않는다." 행복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부어 마침내 성취를 이뤘을 때 얻어지는 것. 가슴으로부터 솟구치는 희열에 벅차오르던 행복한 순간들은 돈이나 가족관계에서보다는 애장품들을 쓰다듬는 순간에 그는 느꼈을 것 같다. 생전의 게티 씨도 행복은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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