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명은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구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전설적인 영웅 헬렌이 건국한 나라로 자신들을 모두 헬렌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헬라스라 칭했던 그리스인들. 하여 그리스 풍 또는 그리스 전통이나 정신이라고도 해석되는 헬레니즘이다.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그리스 문명권. 그들은 언덕으로 된 지형을 공들여 다듬어 여러 단(段)의 테라스로 만들었다. 그 위에 웅장하고 독창적인 그들만의 고유 양식으로 신전, 제단, 극장, 도서관, 왕궁 등 기념비적인 구조물들을 곳곳에 세웠다.
헬레니즘 문화가 찬연히 빛나던 나라이자 민주주의와 철학과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원래 뜻이 영예로운 사람이라는 Greek가 어쩌다 맥 빠진 국가요 국민으로 전락했을까. 지중해의 눈부신 경관을 배경으로 터 잡아, 저리도 찬란한 문화유산들을 수없이 물려주었건만 원상태로의 보존은커녕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나라. 힘, 국력이 딸리면 정신도 문화도 다 의미를 잃고 허무하게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며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건가. 바실리카 전시실의 제우스를 비롯, 좌우로 열 지어 서있던 제신들과 화려한 코린트식 신전의 영광은 어디로 가뭇없이 사라졌을까. 성하면 반드시 쇠하게 마련이라는 세상 이치대로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초상(肖像)은 헬레니즘 조각의 업적 중 하나로 신, 제왕, 귀족, 사상가들의 숱한 조각상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현재 그리스 내의 미술관 외에 나라 밖으로 떠나 세계 각처 유수 미술관 등에 그 많던 조각상들이 제각각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 그중 1천여 점이 게티 빌라에 영구 소장되어 있는데 온몸으로 굴곡진 세월을 모질게 맞선 이력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신전 중앙에 몽둥이를 들고 위풍당당히 서있는 남자, 황금 사자를 때려잡았다는 헤라클레스 조각상만이 요행히 온전할 뿐이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도 양팔이 잘려나갔듯 대부분의 석상들은 신체 어디든 훼손을 입어 거의 원형 유지를 하지 못한 채다. 아름다운 아미와 코가 이지러진 여신의 얼굴, 근육질의 청년은 턱이 떨어져 나갔고 목이 사라지거나 몸조차 동강 난 신도 있다. 갑옷의 장군은 팔다리를 모두 잃었고 머리 뒷부분이 손상된 석상에 심지어 동체 일부분만 남은 처참스러운 형상도 보인다.
굳은 돌이 저 지경일진대 흙으로 빚은 테라코타 소상이며 도자기나 유리기명이야 말해 무엇할까. 자연재해를 입거나 전쟁의 상흔으로 또는 도굴이나 약탈 과정에서, 아니면 암거래 운반 도중에 마블이 깨어져 나갈 정도라면 박살 나버린 연질의 예술품인들 오죽 많을 것인가. 거개가 신전 장식의 일부이거나 무덤 부장품 혹은 화산재에 묻혀 오랜 세월 매몰되었다 발굴된 것들이리라. 멀쩡해 보이는 작품들도 잘 살펴보면, 세심하게 조각을 덧붙이거나 때워 복원시킨 잔 금 흔적이 도처에 나있다. 전시품으로 그나마 고이 옮겨진 작품들 외에 얼마나 숱한 문화재들이 산산조각 나 어둠에 묻혀 버렸을까.
무생물일지언정, 험한 풍파 겪으며 우여곡절의 고된 여로 지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조각을 보니 많은 생각이 교차된다. 마지막으로 깃든 안식의 터, 여기 게티 빌라에서 오래오래 평화로운 안식 누리길 기원해 마지않게 된다. 지진이 잦은 캘리포니아다. 그러나 더 이상의 고난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제각각 신산스러운 여정을 대변해 주는 몰골들. 저마다 온전했던 본연의 모습 잃은 조각품들. 로드킬 당해 무참히 명을 다한 길짐승을 보듯 안쓰럽기조차 하다. 제행무상, 생긴즉 마침내 모든 건 스러지고 만다. 바람이 임하매 지고 마는 꽃잎 같은 유한성. 생애 내내 부족함 없이 풍요로웠던 게티 씨인들 넘치는 재화가 오히려 재앙의 근원이 아니었던가. 게티빌라를 나서면서 헛되고 헛되구나를 곱씹다가 문득, 하여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귀하다며 고개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