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 향을 아시는지?

2017

by 무량화


이제 곧 꽃의 여왕 장미가 계절의 여왕 오월을 더욱 돋보이게 받쳐줄 것이다.

늘 오가던 등굣길, 브레이크 타임인 봄방학을 마치고 며칠 만에 나섰는데 도로변 조경을 위한 장방형 화단에 홍장미가 만개했다.

장미치고는 우아하다기 보다 납작한 꽃송이가 화들짝 되바라지기까지 해 예쁜 축에는 못 끼는 장미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저지난해부터 익숙해진 후각의 기억이 장미화를 보자마자 즉각 깨어났다.

그 장미는 여느 장미향과 달리 해당화 향기를 풍겨서 나도 모르게 그 앞에 멈춰 서곤 했었으니까.

사진에 담아도 두었지만 하도 신기해 몇 번인가 장미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짝 코를 대고 향기를 탐할 적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을 때 오히려 향은 감미로운 안개처럼 휘감겨왔다.

밤새 꽃들도 잠을 자는지 장미 향은 이른 아침 등교 시간보다는 하굣길에 훨씬 더 진하게 느껴졌다.

벌나비가 향을 따라 모여들려면 당연히 만상이 깨어있는 시간대여야 할 거란 선입견 혹은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액체 황금'이라는 향수 산지로 이름난 불가리아에서는 새벽 시각에 장미를 채취한다고 들었다.

이슬이 마르지 않은 채로 꽃잎이 촉촉할 때 서둘러 꽃잎을 따야지만 높은 품질의 로즈 오일을 추출할 수 있다고 했다.

발칸산맥의 Rose Valley에 있는 카잔루크(Kazanlak)는 장미 마을로 유명하다.

지역적으로 그곳은 장미가 필 무렵 일교차가 유난히 심해서 향이 더욱 짙고 깊다 하였다.

밤에 핀 꽃송이가 싱싱한 상태를 유지할 때 재빨리 꽃잎을 채취해야 향의 증발을 막는다고도 했다.

여기서 보기엔 해가 올라와 벌나비가 날아들 즈음이 향기가 한결 짙은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런 느낌은 꽃가루 매개체를 찾고자 '꽃은 향기로 벌나비를 부른다'는 고정관념에 따른 착각일 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오늘도 해당화 향이 풍기는 홍장미 곁을 나는 쉽게 떠나지 못하고 한참토록 서성거렸다.

아득히 멀어져 간 날들에 대한 연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고향인 충청도 해안가 갯벌을 따라 초여름만 되면 어디나 해당화가 널려있었기에 진작부터 친했던 꽃이다.

지금의 대호 방조제 주변에도 흔했지만, 걸스카웃 일원으로 안면도에 여름 캠프를 갔을 때 지천으로 만났던 해당화.

해수욕장 인근 모랫길에 연분홍 갯메꽃과 어우러져 장관 이룬 해당화 군락이야말로 그중 인상적인 정경으로 남아있다.

캠프장이었던 시골학교 교정에까지 해수욕장 쪽에서 불어오는 갯내음 섞인 해풍 결결에는 해당화 향기가 묻어왔다.

다홍빛 홑겹 꽃 어디에 그리 깊고도 아련한 향을 품고 있었던지, 그렇듯 멀리서부터 향으로 마음 사로잡던 꽃.

그 여름 우리들 인솔교사였던 체육선생은 총각임에 반해 이혼녀인 음악선생은 가디언 자격으로 걸스카우트 캠프에 동행했다.

헌데 그곳에서 둘 사이에 눈이 맞으면서 뜻밖의 로맨스가 엮어졌다.

둘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어수룩한 나도 눈치챌 즈음, 학생들 사이에 그들의 열애 소문이 좌악 퍼졌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된 배경은 어쩌면 취할듯 감성을 자극하는 아련한 해당화 향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노래가 유행하기도 전인 당시로는 장안을 뒤흔든 가십거리가 된 사건이다.

둘이 연애질하는 바람에 학생관리는 뒷전이라 우리끼리 하루 진종일 내내 바다에서 신나게 놀다가 물집 투성이 등짝을 만들고 말았다.

햇볕 화상을 입어 화닥거리는 등을 식히려고 두레박질한 우물물을 서로 끼얹어 주며 그래도 재밌다고 하하거리던 당시.

무엇보다 희한한 건 준수한 용모에 키가 큰 체육선생과는 대조적으로 거세게 보이는 말상에 퉁실하기만 한 음악선생이라서다.

그렇기에, 어느 한구석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이라서 풋내기 소녀들 맹랑한 상상력을 총동원해가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해당화,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오래전 삽화 한 토막이다.



요샌 해당화 열매가 당뇨와 관절에 좋다 하여 씨가 말랐다고 한다.

실제 장미보다 더 날카로운 잔가시가 무수히 돋아있어 섣불리 그 줄기에 손댈 수 없는 해당화다.

해당화는 얼핏 보기엔 장미화와 흡사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점이 여럿임을 알 수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잔가시가 많으며 빳빳하고 윤기나는 장미 잎과는 달리, 해당화는 잎새가 연하면서도 잎 결결에 잔주름이 졌다.

꽃 이파리 역시 장미보다 얇고 여리며 토종 꽃은 소박한 홑꽃이나, 원래 동백이 그러하듯 개량에 의해 요샌 겹꽃이 자주 보인다.

오래 눈에 익어서일까, 아무래도 홑꽃의 청초미가 더 단정해 보이며 겹꽃은 화려하지만 어딘가 탁한 느낌도 준다.

뭐니뭐니해도 해당화의 최대 매력은 신선감이 들 정도의 맑고 청신한 향기가 아닐까 싶다.

감각적으로 스며드는 한편 클래식한 향, 신비로울만치 독특한 해당화 향기인지라 누구라도 단번에 매료 당하게 된다.

몇 년 전 한국 갔을 적에 강화도 바닷가 펜션 화단에서 무더기로 핀 이 꽃과 해후했었다.

또다시 한국 찾을 때는 역시 해당화와 만날 수 있게 초여름을 택하려 한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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