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고생대 적 일이다. 키대로 자란 울창한 양치식물이 지각변동으로 쓰러지며 매몰된 그 퇴적물 위로 지층은 두터이 쌓여갔다. 지열과 압력에 의해 유기물이 탄화되는 동안의 덧겹쳐진 日月. 그렇게 길고도 깊은 잠은 계속됐다. 땅속 저 아래 아득한 곳에서 수천만 년에 걸쳐 숙성돼 마침내 뜨거운 열을 품은 에너지원으로 바뀐 양치식물의 화석. 석탄이다.
중앙선 주변 마을이 흥청흥청 붐비던 시절이 있었다. 국내 유일의 부존 에너지 자원으로 보호 육성되던 석탄산업인지라 국가가 앞장서 증산정책을 펴며 장려 지원한 덕이었다. 검은 내(川)가 흐른다는 탄광촌일망정 번성했던 한창때는 사북 도계 태백이 산골 오지가 아니라 경제의 요지였다. 지하 깊숙이 뚫어 내린 갱도 막장에 갇히는 매몰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진폐증에 시달리기도 하며 새카만 얼굴의 광부들은 경제발전을 이끄는 견인차로써의 자부심을 안고 부지런히 곡괭이질을 했다.
긴 침묵의 어둠을 건너 다시금 환생을 한 그날. 환한 지상으로 끌어올려진 석탄은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났다. 하여 검정이라도 암울한 검은색이 아닌, 자르르 윤기 흐르는 먹빛 석탄은 햇빛에 드러나면 오색 광채까지 발한다. 모든 색을 수용할 수 있는 마지막 색이자 가장 분명한 색이 바로 석탄의 그 까만 빛. 사실 검정만큼 개성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색도 없다. 고급스러움과 모던함이 포함된 세련된 품위를 느끼게 하는 신비스러운 색이 바로 검정이니까.
탄광에서 실려 나온 석탄은 줄줄이 이어진 무개탄차를 타고 도시로 갔다. 공장에 부려져 둥근 덩어리로 빚어지는 가공 과정을 거치면 그때부터 명패가 바뀌어 연탄으로 불리게 된다. 7~8십 년 대 허술한 주택 구조에다 입성이 변변찮았던 탓에 유달리 매섭게 춥던 겨울. 그래도 따끈한 아랫목 훈기 속에 몸을 녹일 수 있었음은 연탄의 소신공양, 하얗게 사그라들 때까지 제 몸을 아낌없이 사룬 보시 덕일 터였다. 활짝 폈다 미련 없이 이우는 찔레꽃처럼 역할 다하고는 주저하지 않고 흙으로 되돌아가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닌 연탄.
현재 육칠십 줄에 들어선 이의 대부분은 연탄 세대에 속한다. 물론 솔가지와 장작불 기억이 유년기에 남아있기도 하다. 그후 한밤중의 연탄 갈기와 연탄재 처리하기가 늘 만만찮은 일거리였던 풋내기 주부 시절을 지나 화력의 완급을 조절하는 요령이 붙어가며 우리의 아줌마 이력은 늘어갔다. 당시는 집집마다 취사 난방 겸용 연료로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연탄불 하나만으로 방을 덥히고 밥을 짓고 찻물을 끓이고 목욕물을 덥혔다. 다용도 기능 외에도 다 타고난 재는 미끄러운 빙판길에 깔거나 패인 골목길을 메우는데 요긴하게 썼다.
그러나 한편으론 死神의 마각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니 갈라진 구들 틈이나 문 사이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의한 중독사고였다. 가벼운 경우는 동치미 국물을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도 하였지만 한방에서 잠자던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는 일도 적잖았던 그때. 판잣집이 즐비한 달동네, 살림이 궁색한 집 아이들은 새끼줄에 꿴 연탄을 낱장으로 사 날랐다. 반면 형편이 좋은 집은 연탄광에 수백 장씩 그들먹하게 쌓아두고 살았으니 연탄은 빈부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였다.
경제가 활황기에 접어든 90년대에 들어서자 편리하고 열효율이 높은 석유를 선호함에 따라 연탄은 제 영역을 잃고 사양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몰락하다시피 밀려난 연탄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졌는가 했는데 그래도 어디선가 명맥을 이어왔던 모양이다. 잊혀져 가던 그 연탄이 요즘 난데없이 재등장했다. 그것도 불명예스러운 등판이요 복귀인 셈이다. 하필이면 연탄이 잠자듯 고요하게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어갈 수 있는 자살 도구로 떠오른 것이다. 일본을 비롯 한국 연예인이 연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하더니 급기야는 인터넷에 연탄 자살 동반자를 찾는다는 사이트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베르테르 효과라던가, 바이러스 퍼지듯 연탄 자살자가 늘어나고 있단다. 해서 연탄 화덕을 구입하려는 사람이나 뒷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든 사람이 눈에 띄면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 가정에 연탄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연탄은행이란 곳에서 호소문을 띄우기에 이르렀을까. '연탄은 따뜻함의 상징이고 몸 바쳐 헌신하는 사랑의 아이콘'이라며 제발 연탄을 자살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 달라고 사정한다. 총검류도 아니면서 어쩌다 생명을 상하게 하는 악역을 맡게 된 연탄은 자기 이름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는 탄원서라도 쓰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연탄가스인 일산화탄소는 밀폐된 공간에서 다량 흡수하면 적혈구의 산소 공급 능력을 저하시켜 뇌에 산소 공급이 줄어들며 실신상태가 되어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고 한다. 만일 미수에 그쳐 깨어난다 해도 뇌에 회복 불가능의 흠을 남긴다는 무서운 독성의 연탄가스다. 심리학에서 자살은 정신적 질병의 결과로 해석한다. 무엇을 도구로 쓰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가장 불행한 죽음이다. 나아가 주변 인연들에게는 그 이상 가혹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책임한 자살은 동정 대상이 아니라 명백히 죄를 짓는 행위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다. 유다는 은전 몇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다.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 베드로에 반해 유다는 죄책감에 못 견뎌 자살하고 만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자살한 영혼은 구원받을 기회를 영영 놓쳐버린다는 점이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귀한 생명이다. 살다 보면 세파에 지쳐 너무 힘들다 못해 기진맥진될 때가 왜 없겠으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때인들 어디 한두 번이랴. 산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사바세계란 참고 견디는 세상이란 뜻. 이성복 시인의 시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감에 빠질 때 저마다 극단의 선택을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이 세상에 살아남을까. 정도의 차이뿐 누구에게나 삶에는 환난이 따른다. 그러나 하늘은 시련과 함께 고난을 극복할 힘도 주셨다.
그 옛적 양치식물이 너울대듯 창밖 숲은 지금 푸르름 일색이다. 보라, 잎잎이 눈부신 신록이 우리의 어깨를 부추겨 세울 듯 한껏 생기롭지 않은가. 의기소침을 벗어던지고 기운차게 일어나 다시 뛰어보자고 저 숲이 손짓하지 않는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