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산기슭 휘돌아 꽤 깊숙이 들어왔는가 싶은데 범어사는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기서도 한참, 내원암 가는 길은 숲 오솔길 따라 족히 반 시간은 걸린다. 울울한 편백 숲을 지나 죽림과 신록 사잇길에 마련된 선경. 아아, 비현실적인 그것은 幻이었던가 夢이었던가. 䕨雲谷. 글 그대로 보랏빛 운해였던 등꽃 계곡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환상과도 같은 비경에 황홀해하며 취해 있던 그 잠시 잠깐이 어쩌면 저 아래 속계에선 오백 세가 지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꿈꾸듯 신비감에 취해 분분 날리던 등꽃잎 두 손으로 받으며 왈츠 스텝 밟게 한 그날의 등꽃 구름은 다 어디로 갔는가. 신록의 잎잎이 반짝였고 옥류 청렬한 울림에 어우러지던 꾀꼬리. 그것은 정녕 幻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었다.
상기도 선연한 그 보랏빛 꽃물결.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다. 하건만 이렇듯 새침하니 딴 얼굴로 맞이할 수 있을까. 여린 겨자빛 잎새들의 귀여움은 그새 건강한 초록으로 바뀌었고 주렴으로 드리운 등꽃 대신 그 아래 눈송이로 내린 찔레꽃이 청신한 향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제 어설피 미혹에 빠지진 않으리. 다시는 허망을 안지 않으리. 아련한 봄꿈에의 도취. 그건 어쩌면 서툰 夢遊藤園圖였던가.
성진이 양소유 되어 꿈속의 꿈에서 얻은 가야금도 있지 않더냐.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도무지 알 수 없구나. 산다는 게 비록 한자락 꿈이라지만 아무래도 등운곡만은 백일몽이 아니었으리. 그때 나는 또 한 번의 해후를 기약하고 돌아서며 일주일 뒤를 기다렸다. 허나 그즈음 날마다 하늘은 깊은 우수의 빛인 채 숲에 비구름을 띄워 놓았다. 그 몇 날의 오월 단비에 속절없이 등꽃은 낙화로 져버렸던가.
그러나 아무 자취마저 남김없이 사라진 야속함은 아니었다. 서리서리 감기고 늘어진 등덩굴에서 그 흔적들과 만날 수 있었으니. 줄기마다 살뜰한 열매로 마무리 지은 등꽃의 실팍진 자긍심이라니. 꽃에 버금할 만큼 빛나는 신록의 새 순 끝에 앙징스런 콩 꼬투리 조랑조랑 매달려 지난날이 꿈 아님을 알려주는 거였다.
등나무. 관상용으로 정원에 심어 그늘 드리우고 줄기로는 공예품을 만드는 콩과의 갈잎 식물. 봄이면 보랏빛 등불 켜들고 연연히 피어나는 꽃. 애틋한 전설 한자락 품은 양 갸웃이 숙인 고개, 그 態 너무 고와 차라리 서러움인 등꽃.
그 꽃이 구름으로 핀 등운곡. 먼 옛날 나무를 관장하는 신 있어 터 고르고 골라 가장 아끼는 나무에게 여기 자리잡게 했던가. 아니면 어느 고승이 지나다가 지세 뛰어난 금정 기슭에 사리 묻듯 씨 함빡 뿌렸던가. 등운곡에는 수백 년 생 등나무가 자생하여 군락 이루고 있다.
범어사 일주문 바라보며 왼쪽으로 자욱한 보랏빛 운해. 다시 내원암 향해서 등꽃 터널로 길 터주며 幻도 같고 夢도 같은 비밀스러운 가경을 펼친다. 해묵은 노송 이리저리 감아 올라 한무리 나비 떼로 무도회를 여는 등꽃.
봄이 오면 해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등운곡에 들어 환상이어도 좋은 그날의 봄꿈에 다시 취해 보리라. 하면 또 누가 알랴. 자연이 펼치는 원융한 미묘 법문 들으며 피안에 이를는지.
일순 신록의 숲에 안개 어리더니 홀연 새소리 더불어 승천하는 天衣의 보랏빛 옷자락을 본 듯하다. 그건 분명 등꽃의 넋이었으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