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향기의 유혹

1992

by 무량화

예찬 류의 글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 했다. 아니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작정까지 했다. 대부분의 그런 글은 화려하고 감각적인 언어의 성찬으로만 끝나는 속성을 지닌 까닭이다. 수사를 걷어내고 보면 남는 게 없다는 일침 그대로 알맹이가 없는 글. 거기다 나는 작은 일에 쉽게 감동받고 먼저 흥분해 버리는 단순 체질인 탓에 격정의 역동하는 파도를 유별나게 타는 편이다. 해서 들뜬 기분 그대로 감탄사 연발하며 걸러지지 않은 감흥을 직선적으로 노출시키기 일쑤였다.



삶의 실체가 진솔하게 담긴 글, 주제가 선명하고 뜻이 살아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은 누누이 들어왔다. 그러나 깊은 사유 없이 감성만 앞세워 글을 써온 것을 수긍한다. 서정 수필 쪽에 마음 기울이다 보니 표현 위주로 체질이 굳어진 것은 사실이다. 산문정신도 부족하다. 문학에 임하는 자세 또한 엄격성이나 투철함이 모자람을 인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며 미문에 탐닉하고 미사여구에 굳이 집착한 바는 아니었다. 분식을 위해, 의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려 시도한 적은 없다. 나는 미문체라는 평이나 관념적이라는 지적이 매번 곤혹스러웠고 그 범주에서 벗어나려 나름대로 노력했다.



Y 선생의 수필론에는 문장 성격이 사치스런 글을 미문이라 정의했다. 그분은 특히 수식어가 많은 글을 못마땅히 여겼다. 심지어 사치란 내부로부터 정신을 붕괴시키는 것이고 그런 현상을 퇴폐라 한다고 단정 지었다. 퇴폐적 경향. 말기적 현상으로 일어난 문예 사조로 19세기 후반 서구 문학의 한 풍조였던 퇴폐주의는 병적인 허무감을 특징으로 하는 것. <폐허>라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우리나라의 경우도 당시 주권을 빼앗긴 시대적 암울함을 대변한 것이었다. 어쩐지 그럴듯하다. 내 의식의 심층을 분석해 보면 유사점이 발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로 마냥 뻗댈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내가 절망의 끝에서 잡은 구원의 한 가닥 끈이었으니까.

어쨌든 괜찮다. 다시 일과성 탐미에 머물지라도 나를 취하게 만든 금은화 향기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이 단지 감각의 표피 자극에 그친다 해도 좋고 사람됨이 미숙하고 유치한 징표라 해도 개의치 않겠다. 절제된 표현, 여과 발효된 감정이 수필의 핵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느낌을 풀어놓을 참이다.



아무튼 그날의 금은화 향기는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월의 푸르러가는 들길에서 만난 금은화. 흔히 인동초라 알려져 있는 덩굴 식물로 마침 제철 맞아 꽃이 함빡 피어났다. 처음에는 유백색이다가 꽃이 질 무렵이면 연한 황금빛으로 변하는 꽃. 그래서 금은화 또는 금은등, 더러는 원앙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주난 잎겨드랑이에 반드시 두 송이씩 정답게 돋아 피기에 ‘원앙’이란 이름에다 덩굴 뻗는 식물이라 ‘등’이 붙은 모양이다.



인동무늬라는 게 있다. 당초무늬라 하면 금방 아는, 건축 공예 등의 장식에 널리 사용되는 연결 무늬 말이다. 덩굴이 벋어나가는 형상을 도안화한 것으로 줄기를 균형 있게 배열하여 계속 연결해 나가는 문양이다. 오래전부터 자개로 만든 함이나 자수 및 백자 등속에서 자주 쓰인 인동무늬. 그것은 영원성에의 희구가 아니었을까.

忍冬. 겨울을 참고 견뎌 낸 송백의 강인한 절개와 지조가 연상되고 조선의 여인이 짚이는 이름이다. 그러나 인동초는 늘 푸른 식물이 아니다. 번식력 외에는 인동이란 의미와 걸맞은 게 별로 없는데 어쨌든 그런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오히려 저 혼자 힘으로 줄기를 가누지 못하고 다른 의지처에 기대어 자라는 나약한 갈잎 덩굴임에도 대쪽 같은 이름이 붙어 있음은 좀 의아한 일이다.



산야의 찔레 덤불이나 싸리 울타리에 뒤엉켜 뽀얗게 피어나는 꽃. 꽃보다는 향기로 아이들을 부르던 꽃. 꽃자루 뽑아 그 끝을 빨면 입안으로 흘러드는 꿀맛에 흘려 아이들은 벌이 되어 금은화를 찾아다녔다. 뿐 아니라 인동덩굴은 요긴한 약초다. 민간에서는 종기에 줄기 삶은 물을 마시게 했다. 그늘에서 말린 잎과 줄기는 지금도 해열, 이뇨 등 한방 약제로 쓰인다.



멀리서도 향에 이끌리어 그 앞에 서게 하는 꽃 금은화. 보잘것없다고 하찮게 여긴 꽃의 생김새가 퍽 개성 있다. 하얗게 핀 꽃 저마다가 마치 나래 활짝 편 학처럼 보인다. 아주 작디작으나 먼 창천에 뜬 학의 자태다. 위로 바짝 치켜올린 꽃잎은 묘하게 상층만 갈라져 곧게 편 학의 깃과 흡사하고, 아래쪽에 받쳐진 한 장 꽃잎은 학의 목을 닮았다. 끝부분을 살짝 틀어 구부린 형상이 영락없는 학머리다. 학의 환생인가. 고고함으로 한뉘를 살고 이번에는 자그마하나 향기 높은 꽃으로 피어난 건지도 모른다.



금은화는 애당초 현란한 빛으로 눈길 끄는 꽃은 아니다. 들꽃이 흔히 그러하듯 소박하기가 무명옷 강동하게 차려입은 시골 처자 같다. 향으로야 찔레꽃도 맘에 들고 해당화도 청신하나 행여 꽃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산촌의 수수한 금은화로 피어나고 싶다. 그리고 오랜 여운으로 남는 향기로운 금은화, 그런 향 지닌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 은근 품어 본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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