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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7. 2024

와카치나(Huacachina) 사막의 오아시스

페루

몇 달 전 딸내미가 뜬금없이, 오빠 옆구리 슬쩍 찔렀지? 물었다. 무슨 소리야? 되물으니 오빠가 엄마 남미 여행비 송금해 왔던데,라고 했다. 언젠가 포스팅에 마추픽추 여행을 나의 버킷리스트 첫째로 꼽은 적 있긴 하나, 숨은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아무튼 그 포스팅을 본 아들이 진작에 여행 경비를 보내며 칠순에  아버지랑 두루 남미 구경하고 오시라 했다는 것. 종종 메신저 역할 살뜰히 해주는 J블로그 덕에 그렇게 페루여행을 가게 됐다. 뉴저지 생활을 마무리하느라 시간이 여의치 않은 남편 대신 겨울방학 맞은 손자와 동행, 라틴아메리카 에어라인에 올랐다. 시월부터 여행지 정보를 다양하게 검색해 본 다음 11월 내내 여행코스를 짜고, 신뢰할만한 현지 여행사를 찾아 조인하는 등 준비기간도 나름 길었다. 처음 목표는 적도 넘어까지 내려간 김에 리마에서 출발해 이과수폭포도 3박 4일쯤 여행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추진 도중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말았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경우 한국 국적의 손자는 비자 없이 갈 수 있으나 미국 국적자는 비자발급이 필요, 시간이 꽤 소요되는 데다 황열병 예방접종이 필수라서 주사 맞기 겁나서도 포기해 버렸다. 마침 그때 따라 이사를 앞두고 분주한 딸내미, 위험하다는 인식이 박힌 남미여행인데 여행자 리뷰만 참조하며 엄마 혼자 인터넷 바다 헤집고 다니며 리서치하는 게 맘 놓일 리 없었다. 편하고 안전한 한인여행사의 패키지관광을 택하라고 딸내미는 거듭 권고했다. 막상 여행사에서 보내온 여행상품을 보니 도무지 흡족지 않아, 차라리 다른데 가면 갔지 그렇게는 가고 싶지 않다고 무질렀다.

 

페루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추픽추, 여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선망의 여행 대상지인만치 최정점이자 백미인 마추픽추다. 보통 무대에도 최고스타는 맨 나중에 등장시키듯, 이번 페루 주마간산 유람기도 여행 끝자락부터 역으로 출발하고자 한다. 일정 마지막 코스인 리마에서는 대성당과 뮤지엄만 둘러보고 주안점은 나스카 라인 경비행기 투어에 두었던 터였다. 리마 시내 여행사와 스케줄을 조율하는데 나스카 라인 투어 도중에 지나는 이카(Ica) 외곽 와카치나(Huacachina) 사막에서 버기투어와 샌드보딩 등 사막레포츠도 즐길 거라 했다. 전혀 흥미가 일지 않으니 지역정보에 관해 사전검색 한번 하지 않았으며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고 딴전만 피웠다. 암튼 사막에 살던 사람이 Dune Buggy 타고 사막을 무한질주하며 모래먼지 뒤집어쓰는 일이야말로 내키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경사 급한 모래언덕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샌드보딩 타고 스릴 넘치는 쾌감 맛보라니. 애시당초 사막레포츠는 마땅치 않았지만 일정에 끼어있어 별 수 없이 동행했다. 운동이라곤 걷기밖에 모르는지라 모래언덕을 맨발로 하염없이 걸어보는 투어라면 모를까 당최 내키잖지만 도리 없었다.



한국 TV 프로를 거의 안 보는 나로서는 페루가 언제부터 한국인들에게 최고의 여행지가 됐는지 의아했다. 와카치나는 또 페루를 다녀간 여행자들이 어찌해 그리 강추하는 여행지가 됐는지는 나중에 들어 알았다. (대중을 좌지우지하는 TV프로 영향 톡톡히 한몫.) 심지어 스물몇 시간 비행기 타고 와 이카 사막에서 새해 일출맞이 하는 것이 일종의 요새 신풍속도이기도 하다나.
한때 인도기행이 유행을 타 봇물 터지듯 인도로 가더니 이젠 남미로 몰리는 풍조가 붐을 이뤄서인가. 와카치나 곳곳에서 한국인들을 수없이 만났다. 사막에서, 호숫가에서, 식당에서 들리느니 한국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사도 신비로운 잉카의 땅에서 체험하는 색다른 모험인 사막레포츠에 특히나 한국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모양이었다. 신장된 국력은 반가우나 트럼프 대통령 가라사대, 이제 한국 살만큼 사니 방위비 분담을 해야 한다는 말 나올만하고도 남았다. 아무튼 나는 사막보다 Ica 시내 아르마스 광장 인근 식민지 시대의 거리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니 그게 보고 싶었다. 고대 뇌수술 흔적으로 유명한 미라가 전시된 고고학 박물관도 있다는데 그쪽이 내겐 더 흥미롭건만 어디까지나 개인취향일 뿐. 또한 오래된 포도농장 방문하면 수 백 년 넘은 포도나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와이너리에서는 옛날 포도주 생산시설과 포도주를 담아 숙성시키던 토기 항아리들을 볼 수 있다지만 별도 일정을 잡기에는 남겨진 시간이 없었다.
출국 비행기를 다음날 오전이면 타야 했으니까.

 

이미 짜인 스케줄대로 진행되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거의 어거지로 따라가게 된 와카치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랍게도...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뜻밖의 반전도 그런 반전이 없었으니.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한 낮은 구릉을 동쪽 경계 삼아 광활하게 펼쳐진 고원에 자리 잡고 있는 와카치나 사막이다.
캘리의 황량하고 거친 네바다 사막과는 전혀 다른, 은모래결 부드럽고 미세하니 고와서 이름 그대로 사막다운 사막인 곳. 건조하고 삭막한 서부해안을 달리다 만나는 와카치나 사막만도 경이로움 그 자체였는데, 사구 끝 모르게 물결치는 사막 안에 깃든 와카치나 마을은 더욱 놀라웠다. 실제로 물가에 부들이 자라고 짙푸른 열대 가로수와 부켄벨리아꽃 화사히 핀 진짜 오아시스 마을이었다.
지하수가 지층을 뚫고 나와 고인 물 웅덩이, 푸른 호수 펼쳐진 오아시스가 야자나무에 둘러싸인채 사막 한켠에서 불현듯 나타나자 실상인지 도시 믿기지 않아 내 눈을 의심하듯 눈을 다 비벼봤다면 이해가 되려나.  
마치, 고해에 던져진 우릴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자비로이 준비해 두신 선물 보따리이듯 그렇게 놓인 오아시스 마을.  누군가가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던가. 사막에 위치한 물가라는 이집트어 '거주지'를 의미하는 ouahe에서 유래된 oasis란다. 오아시스는 사하라나 고비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장소, 영화나 소설 아닌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공간이라 여겼다. 그처럼 오아시스는 마음속에나 품는 걸로 알았는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어쩐지 꿈만 같아 비현실감마저 들었다.


 
오아시스는 끝없이 막막한 사막 가운데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이 아니라, 실지로 샘이 솟아오르고 식물이 자라는 곳이다. 비유로는, 곤고한 인생 여정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이자 위로와 위안과 치유의 장소를 오아시스라 부른다. 팍팍한 일상,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고 싶은 적, 살면서 얼마나 많았던가. 끝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이 피안 저 너머에서 손짓하듯 아롱대는 오아시스 환영에 때론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호젓한 물가에 앉아 호심 바라보노라니 오래전 혹은 근자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 다둑다둑 치유되듯 내적 평화가 스며들었다. 마음자리 홀가분하게 바뀌자 눈에 드는 모든 것이 근사하게 보였고 높직하게 펼쳐진 사구도 한달음에 뛰어올라가고 싶어졌다. 버기투어 차례가 되어 10인승 둔버기에 탑승해 안전벨트 조이자마자, 바람 가르며 모래언덕 향해 냅다 질주를 시작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마구잡이로 우락부락 치달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 환호소리 엇갈렸다.
롤러코스터에 비하면 덜 아찔한 것이, 긴장을 풀고 차체가 흔들리는 대로 리듬을 타니 생각보다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허나 샌드보딩은 여차하면 곤두박질치다 다칠 거 같아 아예 뒤로 물러나 사진만 찍었다.
다들 미끄러져 내려갈 때는 신이 나도, 보드 이끌고 다시 올라오는 일이 힘들어 한두 번 만에 판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높직이서 조망해 보니 사진사들 좋은 피사체가 되어주는 파도치는 물결무늬며 굽이쳐 끝 모르게 이어진 모래언덕이야말로 명품이었다. 저 아래 언덕 사이에 두고 크고 작게 펼쳐진 두 오아시스 전경 역시도 압권 중의 압권이라 이리저리 무작정 사진을 찍어댔다. 원래 와카치나란 울고 있는 소녀란 뜻, 잉카의 고운 공주에게는 사랑하는 왕자가 있었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을 감고 만 왕자. 공주는 그를 못 잊어 밤낮으로 슬피 울기만 해 눈물이 못을 이뤘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전설 따라 삼천리 식의 버전 외에 또 다른 설화도 전해진다는 호수다. 특히 일출과 일몰 시 경관이 매혹적이고 북반구 밤하늘과 다른 별자리를 볼 수 있다는데.... 그때까지 머물 형편도 아닐뿐더러 이쯤으로도 흡족했던 와카치나 오아시스 마을이다.  
별다른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행운에 감동받아 마음 한껏 푼푼해져서이리라. 우리를 태우고 왕복 열 시간 여를 운전해야 하는 택시 기사와 동승자에게 기분 좋게 점심 한턱을 쏘았다.
아무리 관광지 레스토랑이라도 워낙 물가가 저렴한 페루라 그래봤자 100 솔 남짓, 달러로 30불 정도라 과용은 아니었다. 여행 자체가 즐거운 소비이듯, 소비치고는 아주 흔쾌한 소비를 한 날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오아시스를 만나고 돌아오는 밤길, 비몽사몽 간에 리마를 향해 달리며 언뜻 소행성에서 온 어린 왕자도 만났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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