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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7. 2024

모래 울음

둔황

90년대 들어 한국에선 무슨 유행처럼 글쟁이나 사진쟁이들이 실크로드를 찾거나 인도로 가는 게 대유행이었다.

어느 시인의 시를 읽고는 나도 실크로드 길목에 있다는 명사산엘 가보고 싶었다.

바람이 불면 모래 우는소리가 들린다는 밍사산(鳴沙山).

모래가 우는 산이라니... 그 한마디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전율이 일었다.

바람이 연주하는 사막의 노래라니..... 눈 감으면 들릴 듯 황홀했다.

바람 따라 모래가 음악이 된다니.... 말만 들어도 감동이었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명사산이 내는 소리도 달라서 산들바람이 불 때면 관현악 소리를 내고, 큰 바람이 불면 북 치듯 우렁찬 소리를 낸다는 그곳.

명사산은 가끔 스스로도 소리를 내는데, 하루 내내 땡볕에 달궈진 모래는 바람 한 점 없이도 저절로 은은한 음악을 들려준다고도 했다.

명사성(鳴沙山)은 이름 그대로 모래가 우는 소리를 내는 모래산이다.

실제는 모래가 굳어 형성된 암반 위로 바람결에 모래들이 밀리며 소리를 만들어낸다고.

현지의 카자흐족들은 소리 나는 모래산이라는 의미로 '아이아이코무'라고 부른다는 밍사산.



피리 소리가 들린다는 명사산 결 고운 모래를 맨발로 걸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서녘 대신 해뜨는 쪽을 향해 미국으로 떠나왔다.

지난봄,  LA 게티 빌라에 갔다가 '둔황 특별전'이 열린다는 안내문을 보곤 꼭 봐야지 별렀으나 그 후 깜박 잊고 지냈다.

어느 블로거의 <둔황석굴> 포스팅이 그 기억을 환기시켜 주자 마음이 급해졌다.

전시 기간이 9월 초까지이나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칠까 봐 서둘러 게티센터를 찾았다.

기온이 백 도를 훌쩍 넘는 칠월이었다.



꿩 대신 닭, 모래가 운다는 명사산을 걸어볼 수는 없어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막고굴 불상이라도 만나봐야 했다.

게티센터 초입 계단 아래 야외 특별 전시공간에 마련된 <둔황전>은,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대별로 짜인 입장 순서에 따라 들어갔으나 천천히 여유 있게 감상할 여건이 전혀 아니라서 떠밀리듯 밀려 나왔지만,
오랜만에 올려다본 불상의 천년 미소만은 낯익어서 내심 반가웠다.



고비사막 안의 박물관 마가오굴(莫高窟)은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인 둔황시 명사산 동쪽 절벽에 오 리 넘게 조성된 석굴 군이다.

돈[敦]은 ‘크다’를 의미하고 황[煌]은 ’ 성하다’라는 뜻.

크게 번성할 도시라는 말대로 둔황은 중국과 서방세계를 잇던 비단길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곧 동서 교역의 중요 통로이자 중국 문명과 간다라 문화가 만나는 접점이었던 둔황이다.

둔황 인근 명사산 자락의 깎아지른 절벽에 벌집 같은 동굴들이 뚫려있는데, 여기에 조성된 거대한 불교유적인 막고굴(莫高窟).

용문석굴.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이다.

부처님 천 분이 모셔져 있다고 일명 천불동이라고도 부른다.



막고굴은 366년 전진 시대 악준이란 승려가 명사산에 이르러 눈앞에 홀연 나타난 금빛을 보고 굴을 만든 것이 시초라 한다.

4세기부터 시작해 16개 왕조, 남북조, 수, 당, 송, 서한, 원 등 천여 년에 걸쳐 석굴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록에는 1천여 개에 달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모래에 파묻힌 곳이 많으며 현재까지 발굴된 석굴은 492개라고 한다.


석굴 일부를 원형 그대로 재현시킨 전시회장은 게티센터 본 건물 측면에 조성돼 있었다.

금번 게티센터에 불상과 벽화 등 1:1 실물대로 재현시킨 석굴은 275번과 285번 그리고 320번 석굴이라 한다.

사막의 대 화랑인 둔황석굴 벽화는 정성스럽고도 섬세한 기예로 유명하며 특히 당나라 때 벽화가 아름답다고.

막고굴에서 가장 큰 불전은 96번 굴로 북대불전이다.

전면에서 보면 9층 누각이지만 그 속은 하나로 트여있는데 거대한 미륵불이 중앙에 모셔져 있다고.



미륵불은 세상이 끝난 다음인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다.

한국에서 자주 뵙던 관음상처럼 푸근한 미소가 자애롭고도 친근하다.

성모님에서 느끼는 모성과 같이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 입적 이후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그래서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갈래로 다르지만, 종교의 궁극인 정상에서는 서로 모두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문득 모래 울음 들리는 사막의 막고굴 96번 굴에 가보고 싶어 진다.


막고굴의 벽화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이 둔황 문서라고 한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모두 합쳐 3만여 점이나 된다는데.

문서는 불교 관련 내용이 중심이지만, 동서 교류 관계를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이나 <인도제당법> 도 있었다.

또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사원의 경영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공사(公私) 문서도 있다고.

석굴 안에는 이처럼 희귀본 문서와 무수한 벽화와 조각상이 있어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도굴꾼의 표적이 되었다.

따라서 그림과 문서 수만 점이 유출됐으며 석상을 들어내고 벽화를 떼어간 흔적도 여기저기 남아있다는데.

약 1천3백 년간 중국 사막에서 잠자고 있던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국의 지리학자 스타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뻬리오에 의해서다.



1900년 막고굴 주지로 굴을 관리하던 왕원록은 우연히 16 굴 안에 봉해져 있던 17 굴에서 수많은 고문서를 발견한다.

청나라 후반기,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 등 서태후로 인해 극심한 국정혼란에 빠진 한 왕조의 쇠퇴기였던 즈음이었다.

어지러운 난국이 이어지며 서구 열강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당시, 문서발굴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온 스타인이 알짜배기를 먼저 골라갔다.

한편 늦게 쫓아온 뻬리오는 20여 일간 1만 5천여 건의 문서 중 중요한 문서 5천 점을 챙겨두었다.

여기에 바로 ‘왕오천축국전’(현재 프랑스 국립박물관 소장)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왕원록에게 약 1만 건의 문서를 은화 6백 량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본국으로 가져갔다.

소문이 퍼지자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들어와 잔여 문서 중 500여 권의 사본을 챙겨갔다.

뒤이어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미국의 워너도 한달음에 달려와 같은 수법으로 각각 벽화들을 뜯어갔다고 한다.



국운이 쇠하면 조상의 얼이 담긴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켜내기도 이처럼 어렵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그나마도 왕원록의 보존 노력과 관리 덕에 둔황 유물이 일부라도 남게 되고 지켜졌다고나 할까.

현재 이들 둔황 문서는 베이징도서관은 물론 해외 각국 박물관으로 흩어져 각각 소장돼 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국립도서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동양학 연구소, 일본의 쇼도 박물관에도 보관 전시 중이다.

한시대를 풍미하며 찬연한 문화를 일궈냈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도 그러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입장.

수많은 유물이 해외로 유출돼 여기저기에서 떠돌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 문득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국력을 키워야 나라도 국민도 문화도 지킬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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