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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8. 2024

물음표를 던진다

충격을 넘어 참담감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고독한 아웃 사이더에서 끔찍스러운 학살자로 변신하여 스물셋 푸른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만 한 청년. 버지니아 텍에서 벌어진 피의 광란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 한국 교민 1.5세가 있었다고 언론은 전한다. 한국 땅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인이긴 하나 어린 나이에 이민을 와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그다. 하건만 캠퍼스 대학살로 불리는 참극을 일으킨 장본인은 바로 사우스 코리안이라고 뉴스는 온종일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민족적 정서가 강한 한국인이며 한민족이라는 유대감이 유별난 한국인이다. 당연히 주눅 들고 자괴감이 들밖에.

 

사랑하는 가족을 졸지에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 미국이 비탄에 잠긴 날. 부시 대통령까지 추도식에 참석하여 모두와 슬픔을 나눴다. 그 뉴스를 접하며 절로 부끄럽고 죄스럽고 미안했다. 누구에게 랄 것 없이 무조건. 하늘과 땅과 세상 모두에게 그런 심정이었다. 911 때 인간임이 부끄러웠고 삼풍백화점 성수대교가 붕괴될 때 한국인임이 부끄럽던 것처럼 그저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민망스럽고 수치스러울 뿐이었다.



어제오늘 사이, 사람들을 만나면 괜히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동양 청년인 그와 모국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사태가 사태인 만치 오죽하면 한국 정부에서조차 모국의 연대책임을 통감한다면서 공식 사과의 뜻으로 조문사절을 보낼 준비까지 했겠는가. 이에 미국은 국가 대 국가의 문제가 아닌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범죄행위이자 미국 내 사회문제라면서 한국의 과잉대응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어느 한 사람의 정신적 공황상태, 모호한 정체성과 소속감 결여에서 오는 내적 갈등에 대해서 태어난 나라가 어떻게 무한책임을 진다는 말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번 사건의 미스터리가 차츰 베일을 벗으며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원인과 배경이 규명되며 예외 없이 사후약방문 격일지라도 저마다의 처방안을 내놓고 있다. 다인종이 모인 다문화의 결집체가 미국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그가 어느 인종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초점이 맞춰져야 할 곳은 한 이민 가정이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겪는 내적 갈등과 혼돈으로 야기되는 정신적 공황상태이며,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 고질 병폐인 합법적 총기 소지권이며, 나아가 사회에 만연된 폭력문화가 빚은 병리 현상의 재진단이다.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번 산업화에 따른 계층 간의 불평등이 키운 돌연변이인 무차별적 폭력 문제와 미국의 자유로운 총기 소지를 규제하자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질 것이다.



무엇보다 특히 사회적 반향이 엄청난 버지니아 텍 참사를 계기로 자성 자숙하며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일대 경각심을 다져야 할 한국, 한국인이다. 이미 이민 역사 100년이 넘은 우리다. 재미동포 수가 2백만에 이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는 한국인 까닭이다. 그런만치 이번 사태는 어쩌면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닌, 조기유학이나 어학연수를 계획하거나 자녀교육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이민을 준비하는 한국의 모든 가정이 재고해봐야 할 일이다. 나아가 자녀를 키우며 사는 모든 교민들의 ‘우리 일’이 아닌가 싶다. 또한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모두가 곰곰 자녀교육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부모 역시 자식을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꿈을 안고 어렵사리 건너온 미국이다. 이민 초기의 생활은 대부분 불안정한 데다 긴 시간의 노동으로 부모들의 심신은 지쳐있게 마련이다. 여덟 살 무렵, 엄마가 필요하고 옆에 그저 누군가가 있어줘야 할 나이에 그에게는 보살펴 줄 부모도 곁에 없었고 함께 놀아줄 친구도 없었다. 자아가 확고히 형성되기 전인 유아기나 청소년기에 해외로 이민 혹은 유학을 왔을 때 겪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라고 한다. 이에 따른 부적응은 소외감으로 연결되고 동시에 정서불안이 생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말도 물도 낯선 땅에서 혼자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적 갈등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절로 미아가 되어 헤매게 됐을 터이다. 그러면서 차츰 소극적인 자기 안에 갇혀 폐쇄적이 돼가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외톨이로 남게 된 그. 거기에다 과중한 짐이 더 얹혀진다.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학을 다니는 누나. 자신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공함으로써 고생한 부모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감. 동시에 부모와의 대화 부재는 세대 간의 단절로 이어졌다. 마음 나눌 벗도 인척도 없이 편집광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한 채 자신의 불행에 대한 불만만을 키워온 그. 고립된 자아 속에서 십오 년여를 검게 키워온 세상을 향한 그의 분노 적개심 증오심은 마침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적 폭력으로 표출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물음표 뒤에 숨기고 살았다. 서명조차 물음표로 대신하며 세상과 벽을 쌓고 현대사회의 물질문명과 미국의 속물주의를 냉소하며 대치하던 그가 택한 마지막 저주 어린 복수극. 진작에 그의 내적 출혈을 알아채고 다스려야 했었다. 정신적으로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너’는 누구인가. 그를 미치광이 살인자로 내몬 ‘너’는 누구인가. 2006/4 미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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