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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8. 2024

재채기와 사레

하도 더웠던지라 여름이 그리 쉽게 물러가겠나 싶었다. 그러나 여축없이 가을은 왔다. 삽상한 바람도 잠시, 어느새 날씨가 싸늘해져 아침 등굣길엔 해바른 양지쪽만 골라가며 걷게 된다. 한낮의 귀갓길엔 윗옷 한 겹 벗어 허리에 두른 채 물론 그늘 밟고 오게 되지만. 오늘만 해도 기온이 오르락내리락 최저 48도, 최고 88도를 가리키니 감기 들기 딱 좋은 환절기 기후 맞다. 전형적인 사막 지역답게 일교차가 이리 심해, 아침엔 재킷 걸치고도 재채기를 해대고 한낮엔 반팔 차림으로 지낸다.


조석으로 쌀쌀해진 날씨라 재채기가 부쩍 기승을 부린다. 아침 기상 후 첫 일과인 창문을 열면 일단 재채기 연발, 학교나 성당에서도 걸핏하면 재채기가 나오는 통에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갑자기 찬 공기에 노출됐을 적이나 먼지, 연기 혹은 매운 내나 향수 내음을 맡아도 재채기 심하게 터지는 체질이다. 전에 세탁소 하며, 손님 중 유난스럽게 향수병 들이부은 것 같았던 사람만 오면 통제불능 상태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날씨 조금만 추워져도 그렇고 남들은 괜찮은 카펫이나 강한 냄새에 후각 민감하게 반응, 대뜸 재채기부터 나온다.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사람 곁으로 고양이가 스쳐지나기만 해도 주체할 수없이 재채기를 해대는 것처럼. 코 간질간질하다가 갑자기 재채기가 여러 차례 쏟아지면서 맑은 콧물이 주르르 흐르고, 어느 땐 심지어 눈물까지 난다.


체면이고 염치는 물론이고 때와 장소 가리지 않는 재채기. 자극원만 있다 하면 반사적으로 몸이 알아서 전자동 시스템처럼 터져 나온다. 재채기는 한랭 자극, 먼지나 냄새 등 코 점막 자극하는 물질의 반입을 일체 불허, 무조건 체외로 배출시키려는 생리적 반사 운동이다. 한마디로 이물질이 접근해 코 안으로 침투하려는 걸 막아주는 고마운 재채기다. 재채기하는 사람에게 "God bless you"라 해주는 것은 전염병이 창궐하던 중세,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재채기는 병에 걸린 신호이니 신의 가호를 빌어주라고 권고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반대로 재채기는 건강 도우미, 한두 번 터지는 재채기는 비강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연달아 나오는 재채기는 체온을 높여준다. 순간적으로 몸의 많은 근육이 활동, 생체 에너지 왕성해져 체온이 상승돼 면역체계 돋워주려는 의도. 재채기할 때 경험하듯 머리와 목 언저리며 흉부와 아랫배가 땡길 정도의 근육운동이 삽시에 이루어진다.  

 

에취~재채기는 그나마 낫지만 사레가 심하게 들리면 킥킥대며 숨쉬기도 어려운 호흡곤란으로 질식할 듯 괴로움을 겪는다. 가끔 뇌의 명령 회로 가 엉키는지 식도로 들어갈 물질이 기도 통해 폐로 유입되려는 찰나, 기침이라는 방어책이 격렬하게 작동된다. 식도와 기도는 목에 나란히 붙어 있는 기관으로, 음식을 삼키면 기도와 식도 중간에 있는 후두개에 의해 자동으로 기도를 막아 음식을 식도로 들어가게 해 준다. 헌데 나이 들며 이 조절 능력이 헐거워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전에는 어쩌다 한번 들리던 사레인데 나이 들수록 보다 자주 걸리니, 신체 기능 별게 다 둔화되는구나 싶어 한심해진다. 인후 성능이 선천적으로 부실한 건지 예민한 건지, 특히 어렵거나 조심스러운 자리에서 식사할 때 느닷없이 사레들려 난처하게도 만든다. 하긴 집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먹거나 물을 마시다가도, 심지어 침 삼키다가도 사레든 적이 있긴 하다.



어제 월요일 수업 중이었다. 입안이 건조하고 목도 칼칼해 물을 마셨다. 반쯤 남은 물병 기울여 목을 젖히고 한 모금 넘겼는가 싶었는데 쿡하며 사레가 들렸다. 물이 내려가야 할 제 길을 잃고 그만 기도로 넘어간 실수를 하고 말았다. 조용한 자리 거북스럽게 만들지 말고 그때 얼른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기침도 아닌 킥킥 괴이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삐져나왔다.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쏠렸다. 시선집중이 되자 더 당황도 되고 무안해, 얼굴까지 빨개진 내게 선상님은 재차 괜찮냐고 물었다. 그나저나 사레를 영어로 대체 뭐라 하는 거야. 아이 참~ 싱경질나! 숨길이 막혀 말할 수도 없으니 괜찮다며 고개만 끄덕댔지만 죽을 맛이었다.


옆 사람이 물을 마시라 했으나 물 마실 계제가 전혀 아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물은 무슨 물. 기도로 새들어간 물 때문에 곤란 겪으며 물기 밀어내려 애쓰는 판에 물을 어찌 마신담. 기침 잦아들어 기능이 정상화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려니 순간이 영원 같았다. 경황 중에도 애공~망신, 잔등에 후끈 진땀이 다 났다. 돌발적으로 터진 생리현상이 사람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여간 별 추접을 다 떨어요, 고이 나이 들면 어디 덧나나? 평소 음식을 급하게 먹기는커녕 세월아 네월아 완전 충청도식 느림보 식사를 한다. 그럼에도 자주 들리는 사레. 처방전은 입과 목운동하기, 생각날 적마다 인후 근육 강하게 하는 훈련하라고 한다. 인후부에 다양한 자극을 줘 근육 강화시키기 위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거나 아, 에, 이, 오, 우를 자주 해보라니 따를밖에.


식도와 기도 근육의 수축 이완 기능만이랴. 기계도 오래 쓰면 아귀 딱딱 맞아 돌아가던 톱니바퀴 나사 느슨해진다. 나이 들면서 사대육신 오장육부 당연히 인체 기능 하나씩 약화되고 면역력도 떨어진다. 체형이 구부정 변하고 신장이 줄어든다. 근력이 쳐지고 골밀도가 감소된다. 이는 물론 눈도 사십 대 들면서부터 서서히 나빠지는 표 역력해진다. 청각이 시원찮아지기도 하고 호르몬 작용도 덩달아 쇠퇴된다. 피는 갈수록 탁해지는데 좁아진 혈관은 탄력마저 예전 같지 않아 진다. 소화효소 분비량이 줄어들고 심장과 폐 등 내부 장기도 효율성이 떨어진다. 근력은 물론이고 균형감각, 지구력, 유연성도 낮아진다. 피부가 탄력을 잃게 될 즈음이면 모발이 세면서 남성들은 대머리도 된다. 청년기보다 노년층 뇌는 10%가 위축돼 그만큼 뇌기능도 엉성해진다. 나이 들어 기억력까지 오락가락하면 진짜 겁먹게 된다.  


그러나 어쩌랴, 봄여름 지나면 반드시 가을 겨울 오게 마련인 것을. 봄에 새순 힘차게 돋아나 여름 한철 녹음방초 무성하다가 가을 되면 물기 메말라 낙엽으로 지는 식물의 한살이. 모든 사물은 생성되어 일정 기간 존속하다가 소멸돼 이윽고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철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이처럼 생명 있는 모든 것에 해당되는 단 하나 공평한 원리라면, 나서 성하다가 마침내 이울어 공으로 비어지고 만다는 것. 얼마 전 한가위 만월이 그새 눈썹 같은 그믐달로 이지러진 것만큼이나 자명한 이치다. 생성이멸(生盛異滅)은 삼라만상 어디에나 해당되는 자연의 섭리이자 엄혹한 우주의 질서다.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 세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야말로 동서고금 어디서나 통한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어/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렷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매라. 고려조 문신 우탁이 남긴 시조 탄로가(歎盧歌)다. 아무리 막대 들고 설쳐본들 자연의 순리대로 때맞춰 오는 백발은 외려 지름길로 찾아온다 하였다. 인생무상 통절히 느껴 푸념하고 탄식하며 체념에 빠진다거나, 비방약과 운동으로 젊음 되찾겠다고 생억지 부릴 일이 아니다. 불로초를 매일 고아 먹은들, 근육 단련 운동에 온종일 매달린 들, 칠팔십 대가 젊은이 같은 신체 건강과 강인한 체력 바란다면 망발이고 과욕이다. 날마다 죽을 둥 살 둥 체력단련에 매진하지만 바라던 바 얻기 전에 온 삭신 쑤시고 결리는 근육통, 요통, 신경통이나 오지게 얻어 쩔쩔매게 된다. 도전정신과 투지는 가상하나 어느 경우건 과유불급은 진리다.


하는 짓 또는 모양새가 나이와 지나치게 어긋져 괴리가 심하거나 격에 걸맞지 않을 경우. 당사자 의도와 관계없이 남보기 불편하고 볼썽사납다.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근력 약화되면 약화된 대로, 주름 깊어지면 깊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늙어가기. 과도한 성형으로 웃지도 못하는 어떤 연예인이나 덕지덕지 화장한 노년의 리즈 테일러 두고 흉하다는 말 공공연히 나돌잖던가.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진 않겠다며, 청춘을 되돌려보려는 안간힘은 노욕 같아 차라리 처연하다 못해 안쓰럽다. 노추(老醜) 소리 듣지 않으려면 오히려 나이듦을 수긍하고 연륜에 걸맞는 삶의 지혜로, 나이테가 만들어 준 세월의 품위 단아하게 가꾸는 편이 훨씬 보기 좋지 않을까 싶다. 하긴, 사레 덕분에 날마다 노래 부르게 생겼으니, 노년의 품위 아랑곳 않는 늦깎이 카수 하나 나올 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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