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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5. 2024

샤이한 사람이래

열여덟만 되면 할 수 있는 투표를 이 나이에 처음으로 했다.

가로 늦게 지긋하니 나이 들어 미국 온 까닭에 거의 從心에 이르러서야 첫 투표를 해보는 것.

이나마도 재작년 시민권 시험을 본 덕에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4년 주기로 실시되는 미국 대선이 치러진 11월 8일, 그러나 일찌감치 우편으로 한 표를 행사한 터였다.

투표하라고 선거용지와 안내서가 배달돼 온 것은 한참 전 일이다.

투표용지를 받고 꼬박 하루. 안내지와 설명서 펴놓고 연구(?)를 했으나 내게는 너무 어려운 미국 대통령 선거방식이었다.

미국 대통령 투표 방식은 독특하다.

선거인단 제도와 승자독식제라는 선거제도부터 특이하다.

대통령 입후보자만 한 줄로 나열된 단순한 한국 투표 방식하고는 영 다르게 일단 수많은 선거인단 목록에서 지질려 버린다.

45대 대통령 선거 투표용지에 대통령 후보만 나온 게 아니라 주의원 구의원 시장 판사 경찰서장 등등까지 한꺼번에 뽑으란다.



트럼프 & 힐러리 이름을 한참 만에야 찾았을 정도, 그 외는 생판 안면도 없을뿐더러 생전 들어 보도 못한 인물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거기다 선거하는 김에 주민세 올릴까 공원 더 만들까 이것저것 도시정책까지 다 물으며 Yes, No 질문에 답하라고 한다.

수십 문제를 안내서와 대조하며 제자리에 동글뱅이를 칠해줘야 되는 빡빡한 답지를 보니 마치 수능시험을 푸는 느낌이 들었다.

두툼한 설명서를 하루 종일 암만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어 결국은 스승님 조언을 듣기로 했다.

뽑을 대통령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했구유, 헌디 대통령 후보 외의 이 많은 사람들 누가 누군지 하나두 몰러유.ㅠ

대부분이 듣보잡이라서 사실대로 고했더니 정 모르는 경우 공백으로 남기라 했다. 이럴 때 한인 후보라도 있다면 망설임 없을 텐데.

그럭저럭 진도가 나가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에 체크를 한 다음 우체국에 가서 봉투를 밀어 넣었다

투표장을 직접 찾아가 현장 스케치를 하고 싶었지만 자칫 법에 저촉되는 행위이기도 한 데다, 낯선 투표장 분위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꼴 될까봐 기표한 투표용지를 이처럼 미리 우편으로 보냈다.

대통령 선거날이라 투표 얘기로 출발했지만 주제는 그게 아니다.

꽃다운 방년 16세, 수줍은 처자도 아니면서 이 나이에 샤이하다는 소릴 들은 얘길 하려 한다.


영어 공부한답시고 학교에 다닌 지도 어언 만 이태째다.

허나 영어가 별로 느는 줄도 모르겠는 것이 여전히 의사소통은 어림없고 말문을 열려면 버벅거리기부터 한다.

수업 중에 선생님 설명의 요지나 질문의 핵심은 파악이 되는데 막상 답변할 자리에선 쩔쩔매며 선뜻 대답이 안 나온다.

왜냐? 말을 옳게 만들지 못해서이다.

알긴 아는 눈치이나 우물쭈물, 선생님도 매번 벙어리 냉가슴 앓이만 하는 내가 안타깝다.

실제로 유창한 우리말로 하라면 까짓 수업 진행도 하겠다마는 영어가 돼야 멘장이든 훈장이든 해 먹지.

영어를 자재로이 구사하는 수다꾼 다변가가 되고 싶다.

말문이 트여 폭포수처럼 시원스레 하고 싶은 말 좔좔 쏟아붓고 싶다만....

시험을 치면 성적은 곧잘 나오는데 정작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걸 두고 모두들 희한하다는 눈빛들이다.

도시 이해불가인 정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스승님께서 드디어 '성격이 샤이해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뻔뻔스러워지고 뱃장 두둑해진 이 나이에 발표조차 부끄러워 못할 만큼 내가 수줍음을 탄다니 완전 개그감이다. ㅋㅋ



낙숫물이 바위 뚫는다 하였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그대로 줄줄 다 아래로 빠져나가지만 표티 안 나게 콩나물은 자란다.

그 법칙에 기대어 회화 실력이 좀 늘려니 했으나 콩나물 키는 매양 그대로인 채 품새가 영 오종종하기만 하다.

해도 해도 실력이 나아지질 않으니 이젠 남세스러워서도 공부 소리는 쏙 들어가고 운동하러 다닌다 둘러댄다.

영어 아닌 운동에다 방점을 찍어놓고 슬쩍 시선을 돌리게 하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내가 영어공부를 하는 까닭은, 한국인이 별로 없는 지역인만치 미국인들과 자유로이 소통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럼에도 힉교 수업방식은 당장 필요한 회화 연습은 뒷전인 채 계속 문법 공부에만 치중한다.

도대체 문법은 왜 하는 거야, 골머리 아프게시리.

짜증이 나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다.

문법은 기본 뼈대, 언어를 이루는 형식이나 양식을 알고 그에 따라 단어를 알맞게 운용해 나가야 한단다.

문법은 엔진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숙달시켜야 한다나.

수학의 공식처럼 적절한 문법을 적용시켜서 문장을 써야 옳은 영작문이 될 테고 그러니 하긴 해야 한다.



문법 시간, 모르는 단어들만 영어사전 찾아본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한글사전도 수시로 들척여야 한다.

거의 쓰지 않던 생소한 낱말이라서 뜻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 때문이다.

동명사라, 이게 뭔 소리여? 술부는 또 뭐람? 알쏭달쏭이 아니라 전혀 감도 안 잡히니 사전을 찾아야 한다.

부정사 수동태 등등 이딴 것에 매번 걸려 넘어지는 나. 머리에 쥐가 난다.

went와 gone의 서로 다른 용처를 이해하려면 또 한참을 헤매야 한다. 에효~머리카락만 세게 이 나이에 뭔 짓이고.

과거형이면 과거형이지 과거분사는 또 뭐니? 자동적으로 젠장~ 소리가 나온다.

여태껏 글을 써오며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다. 골치 아픈 룰을 만들어 놓고 왜 이 성화들이람.

명사 동사 아랑곳 않고 뭐든 자재로이 말하고 쓰고 살았는데 지금사 이걸 꼭 해야 돼?

영어로부터 도망쳐 한국으로 아주 갈까 싶다가도 그건 너무 치사하고 비겁하다.

영어가 웬수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다 오기가 발동한다.

미국 와서 세탁소 하며 난생처음 노가다보다 더한 일도 너끈 정복해 냈는데 영어라고 못할쏘냐.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삼 년 차가 되는 내년엔 영시를 써 내릴 수 있을지 모르는 일.

ㅎㅎㅎ 꿈도 야무치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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