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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6. 2024

카미노 도반들

카미노 스토리

숫자 헤아리기 버거울 정도로 숱한,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졌다. 옷깃만 스친 인연부터 눈인사 겨우 나눈 사람, 잠시 서서 몇 마디 대화 나눈 사람도 있으니 옅고 깊은 인연의 두께는 제각각. 사진을 찍어주거나 절친 같은 포즈로 같이 사진 찍은 사람,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나눠먹은 사람, 손톱깎이가 필요하대서 빌려준 사람, 배낭끈을 알맞게 조절해 준 친절한 사람도 만났다. 숙소에서 여행 정보를 교환한 미국 교포도 있고 하루나 이틀 연속 동행한 사람도 있으며 닷새 내리 도반 되어 걸었던 수녀님도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그때 우리는 옆이나 아래위 자리를 배정받았다. 또한 마켓에서 재료를 사 샌드위치 만들어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먹기도 했다. 수녀님이 갖고 온 미역국이며 누룽지를 끓여 함께 떠먹었고, 볼일 보는 동안 짐을 맡아줘 특히 편했다. 24시간 밀착 행동을 한 우리는 미리 약조를 해뒀다. 서로 조용히 홀로 있고 싶을 때 즉 침묵시간이 필요할 경우 먼저 "금"이라 말하기로. 그러다 각자 패턴대로 카미노를 걷기로 하고 헤어졌다. 보조 맞추느라 신경 쓰이는 데다 생활리듬이 차이 나기도 했지만 결정적 이유는 수녀님이 발목 인대 치료차 뒤처짐으로 불가피했다. 카톡 연결은 돼있었지만 번번 길목이 엇갈려 이후 우리는 이상스레 한 번도 재회하지 못했다.



노상에서 상냥한 인사말로 처음 만났다가 또 다른 길에서 재차 해후, 반가이 인사 나눈 사람만도 꽤 여럿이다. 서글서글한 캐나다 아가씨, 숫기 없는 아일랜드 청년, 다혈질이면서도 낙천적이던 브라질 노인, 호주에서 온 교민 내외분, 수차례 카미노 길을 걸었다는 폴란드 중년부부 등등. 그런가 하면 하루 내내 길동무 됐던 도미니카 공화국 영어 선생은 여정 마지막 날 또 만나게 되자 진하게 허그부터 했다. 필연적으로 만날 사람은 우연이듯 진기한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했던가. 헤어지며 우리는 이멜 주소까지 주고받았다. 그런 나라에서도 카미노를? 처음엔 은근 놀랐는데 스페인어권인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산호가 많이 나는 섬나라 출신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던, 이름이 코랄인 사십 대 독신녀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매우 맑았다.



이태리 로마에서 왔다는 사진 속 나탈리아와는 피차 혼자 온 데다 걷는 속도가 아주 잘 맞아 하루 종일 길동무 되어 걸었다. 말수가 적은 그녀는 퍽 소박하고 수더분했다. 수다스럽지 않으면서도 말이 통하는 친구, 우린 여러모로 닮은 공통분모 덕에 쉽게 친해졌다. 약사라는 그녀는 역사와 자연에 관심이 깊어 유적지 찾으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숲에 들어가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나 또한 흥미 갖는 분야라 무너진 성터도 구석구석, 약초가 되는 식물 이름도 신이 나서 주워섬겼다. 유니크한 목소리가 듣기 좋은 데다 성격까지 소탈해 호감이 가는지라 드물게 인증샷까지 찍어 남긴 그녀. 여행의 진수는 홀로여야 제대로 맛보게 된다는 지론 역시 우린 꼭 같았기에 이렇듯 카미노 여정에서 조우하게 된듯싶다. 사진을 보니 다시 만나 함께 걸어보고 싶은 그녀 나탈리아.



길에서 순례객을 만나 말을 트면 으레 어디 출신이냐부터 묻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대략 90% 이상은 서양인인데 동양인으론 한국인이 최다, 가끔 대만인이나 일본인이 섞이기도 한다. 동양 사람인 날 그들은 유심히 보다가 긴가민가한 듯 묻는다, 재패니즈냐고. 일본이라면 정서상 이마부터 찌푸리는 한국이다. 더구나 요즘 토착 왜구 운운하는 판인데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려 버린다. 왜냐하면 진작에 들은 소리가 있어서이다. 카미노 초반, 프랑스 아저씨가 한국에서 왔다 하자 "너희 나라에 사람들이 남아있기나 하냐?"라고 물어왔다. 어투가 어째 시니컬했다. 뒤이어 그는 스페인에 한국인이 저리 많이 왔는데 한국에 남은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바람에 왠지 낯 뜨거워졌다.



신장된 국력 덕에 해외여행을 쉽게 다니는 거 까진 잘 사는 반증이니 뿌듯하다. 그러나 실제 유행병에 취약한 한국인의 심한 쏠림 현상은 카미노 여정에서 뿐 아니라 한국 사회 도처에서 수차 목도된 바 있다. 특히 방송에 한번 떴다 하면 어느 분야건 난리도 아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찾는 이가 많긴 했으나 그즈음 대박 난 방송 프로 덕에 단체관광객까지 몰려든다고 한다. TV 인기에 편승해 재빨리 여행사들이 관광상품을 개발한 것. 그나마 일찍 갔기에 우르르 단체팀과 카미노 도반으로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호젓한 길손 되긴 아예 글렀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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