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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8. 2024

서로 다르다

동과 서

발걸음이 재빠른 아침과 달리 하굣길은 항상 느긋하니 여유롭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 천하태평, 온갖 것 다 건너다보고 둘러보며 유유자적 걷는다.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도 올려다보고, 긴 꼬리 문 화물열차 차량도 세어보고, 길섶 풀꽃도 자세히 들여다본다.


전봇대에 붙은 야드세일 알림판도 홀깃거리고, 빵쪼가리에 모인 비둘기도 지켜보고, 상가 쇼윈도를 기웃거리고,

가로수 순이 얼마나 돋았나도 보고, 가끔씩 통화도 하고 때로는 기록용 사진도 찍고....

버스정거장 근처를 지나는데 붙박이 의자 뒤켠 벽에서 나풀대는 전단지가 눈길을 끈다. 개를 잃었단다.

개를 찾는 내용인데 달랑 개 사진과 연락처만 심플하게 나와있다.

형식적인 공지 의무에 따른 무슨 요식행위 같이 성의 없어 보임은 내가 삐딱해서일까.

애지중지하던 애완동물이 죽으면 이쁘게 묘지를 만들어 두고두고 추모해 주는 건 예사인 이들이다.

언젠가 서양할머니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반려고양이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다는 기사도 났었다.

그만큼 이들의 동물사랑은 각별하고 살뜰하다.   

헌데, 아끼던 강아지라 꼭 되찾고 싶으련만 별다른 수식어 없이 실종신고하듯 그냥 '개를 잃었다'며 만일 눈에 띄면 연락해 달라는 전화번호뿐이다.

간단명료한 것이 역시 쿨한 미국 스타일이다.

일개 동물이란 개념 이전에 부모형제보다 더한 인격체 대하듯 한 침대에서 동고동락하며 평소 유별스럽게 귀애하던
애완견에 대한 사랑방식은 간 곳이 없어졌다.

우리네 정서상으로는 인정머리 없어 보일 정도로 사무적이라 냉정하기도 하거니와 너무 야박스럽다.

매사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목적적인 미국인답다.


반면 한국은 개를 잃었습니다, 가 아니라 개를 찾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잃어버린 개에 대한 모든 정보, 특징, 실종 일시, 실종 장소와 기타 사항까지 꼼꼼하게 기입했다.

사례금도 있는 데다 광고지를 자진 수거할 테니 떼내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곁들였다.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의 경우, 시시콜콜한 내용들에 구질구질하다는 반응도 보내겠다.

그러나 두 장의 전단지 중 어느 쪽에 더 눈길이 많이 닿겠으며 관심 있게 읽겠으며
혹시 그런 개가 보이나 주위를 둘러보게 만드는 것은 어느 전단지일까.

애타게 개를 찾고 있다는 한국 광고는 마음이 담긴 데다 개를 찾고자 하는 애틋한 진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비록 미국 개들처럼 실내에서 한식구되어 같이 뒹굴며 살지는 않았지만 안타까운 심정은 더하다.

한국은 주종 구분이 엄연해 한데서 따로 키울망정 끈끈한 정만은 진솔하면서도 더 뜨겁다.

개를 잃었다고 간략히 말하는 서양과, 개를 찾는다고 호소문을 내거는 동양은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

똑같은 문제라도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이성적 사고와 감성적 사고로 갈라선다.

어쩌면 잃었다, 와 찾는다, 에서부터 동양과 서양의 생각, 관습, 철학, 문화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하긴 동과 서는 서로 차이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반대인 것들이 허다하다.

여기가 낮일 때 한국은 밤일뿐만 아니라 문장 어순이 뒤바뀌었고 성과 이름, 연월일 배열이 또한 그러하다.

오라는 손짓도 우리는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나 이쪽 사람들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다.

워리~워리~마치 강아지 부르듯 하는 그런  손짓이다.

전에 읽은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서 작가는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다뤘다.

자신보다 상대 배려부터 하는 동양, 나 자신에게 우선을 두어 내 방식 내 위주로 생각하는 서양.

감정표현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서양, 감정표현이 소극적이라 애매모호한 동양.

동양인은 감정 표현을 눈으로 하는데 반해 서양인은 입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양권에서 기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은 ^^, 슬픔은 ㅠㅠ인데 서양은 기쁨 :) 슬픔 :(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나면 별 문제도 아니지만 처음 부딪힐 땐 낯설어 의아하고 뜻밖이라 꽤 충격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는 동서가 별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조화 융합 이루는 글로벌시대, 다름은 이해와 포용으로 극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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