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비! 그게 인생!

by 무량화


부산소설가협회가 85년 7월 27일부터 2박 3일의 제4회 여름소설학교를 산청군 청암면 청학동에서 갖게 되었다. 버스 두 대에 분승한 일행 70여 명은 범일동 시민회관을 출발하여 진주 하동을 거쳐 굽이굽이 협곡을 끼고 오후 한 시를 넘어서야 청학동 묵계국민학교에 도착했다. 길고 긴 계곡, 맑은 저수지, 울울창창한 숲, 매미들의 대합창. 그 옛날 속세가 싫어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신선 도골 풍의 한 부부가 이곳에 들어와 푸른 학과 벗했던 곳.


참석자는 경성대학에 계시다가 동국대학으로 가신 시인 이형기, 추리소설가 김성종, 소설가 김수용, 여름소설학교의 단골 강사인 부산대학교의 김준오 교수, 평론가 김중하 교수. 그 외 국제신문의 최화수, 부산소설가협회장 최해군, 윤정규 국제신문 논설위원, 부산일보의 정종수, 부산여대의 이규정, 부산여전의 성병오, 경성대의 조갑상 등이었다.


그때 참석한 문학애호가는 약 60명이었는데, 그 이후 등단한 분은 수필가 구자분, 시인 김광자, 수필가 이영애 등이다. 구자분은 그때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고 등단 후 몇 권의 수필집도 출간했다.


강의는 김준오 교수와 이형기 교수 이규정 교수 그리고 나(강인수) 이렇게 네 사람이 했고 특별히 그해 1천만 원 고료 소설문학상에 청맹과니들의 노래로 당선한 김수용 씨의 체험담 강의가 있었다. 그의 방랑 이야기와 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가로서의 입지적 인물이라 청자들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저녁엔 분임 토의를 가지게 되었는데 저수지의 상류 다리 위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토의와 질의응답으로 두 시간을 보냈다. 이차로 우리들 김준오 이규정 성병오 교수와 몇몇 열성 아마추어 문인들과 맥주를 한잔씩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어느덧 밤중이 되어 은하수가 기울고 있었다. 술은 술을 불러 성병오 교수와 함께 학교 앞에 있는 가게에 맥주를 사러 갔다. 그런데 다리 한가운데에 김중하 교수가 젊은이들에 에워싸여 진지하게 문학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다음 날 등반대장 최화수 씨의 안내로 삼신봉을 올랐다. 그야말로 온몸엔 육수가 흘러내렸다. 하산 길은 청학동 도인촌으로 향했다. 머리를 늘어뜨린 총각 처녀가 있었고 유건을 쓴 어른들이 한문을 읽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중기로 컴백한 기분. 20여 호의 마을에는 토종벌과 약술이 명물이었다. 한 되 3천 원짜리 약술을 마시며 그 날밤 정종수 씨는 청학동에서 살던 지난날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캠프파이어를 할 때 이지나 씨가 율동을 자랑했고, 김성종 씨가 그의 18번 ‘눈물의 웨딩드레스’를 불렀고, 여름소설학교 단골손님 70 청춘 최 교수는 한 구석에서 흘러간 노래를 손수 기타 반주로 불렀다.


맑은 호수, 숲, 도인촌, 하늘의 구름, 은하수.... 이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제 정종수도 몇 해 전에 운명했고, 윤정규 형도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다.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다. 그리고 김준오 교수도 이형기 시인도 이제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우연히 웹서핑 중 들르게 된 강인수교수의 사랑방에서 그의 글 옮김>




결혼 후 십여 년쯤이 흐른 80년대 초에 접어들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문학에 자질을 보였던 재원이 아니다.


국문과 출신도 아니며 가계에 글쟁이가 있는 바도 아닌, 단순히 책을 즐겨 읽는 독서인일 따름이었다.


30대에 이르자 문득 글 쓰는 일에 솔솔 재미가 붙는 거였다.


처음엔 시를 잡고 늘어졌다. 시로 도무지 승부가 안 나자 시조로 이동했다.


시조 초회 추천작이 바로 청학동이 소재였다.


지금은 원본조차 잃어버린 <두류에게>란 시조... 그게 86년도였다.


그해 말 중앙일간지에서 공모한 독서감상문이 최우수로 당선되며 시상식에 참석차 상경하면서 써둔 수필 몇 편을 들고 갔다.


심사위원 중에 원로 수필가가 있었기에 그분에게 글을 보이고 싶어서였다.


당시 문학교실 같은 건 전무했던 때라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제 멋에 겨워 혼자 끄적댄 글이었다.


자기 글에 대한 조언이나 평을 받아보거나 검증해 볼 방도가 달리 없던 당시였다.


제비꽃이 피는 이른 봄, 서울 <문학정신>지에서 축하전보가 왔다.


박연구선생에게 쥐어주고 온 글이 수필로 대접받으며 천료 되어 곧바로 등단을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쉬운 등단 과정이었다.


게다가 6만 원의 원고료까지 보내주는 거였다.


동시에 그 봄 부산문화방송에서 주최한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자가 되었다.


그즈음 폭포수처럼 글이 쏟아졌다.


해서 88년도 올림픽이 열리던 여름에 첫 수필집을 상재했다.


발간된 책표지가 도시 마음에 안 들던 차, 그 기분을 상쇄하려 90년도 두 번째 수필집을 냈다.


환갑 무렵에 책 한 권 묶으려던 계획이 이러저러한 이유와 변명으로 세 번째... 다섯 번째..


어쩌다 보니 나 또한 활자공해를 보탠 격이 되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어디까지나 문학의 주변인일 따름이었다.


좀 철이 들자 더 이상의 활자공해는 일으키지 말자 싶어 삼가했으나, 대신 글 놀이터로 삼은 여기서 인터넷공해 일으키는 건 아닌지.


이젠 팔순에나 장정 인쇄 제대로 된 책 한 권, 마음에 흡족하니 꼭 드는 그런 책 한 권 묶고 싶다는.


충청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경상도 사람을 만나 대구와 부산에서 중년기를 보낸 나.


가로 늦게 때아닌 이민 바람이 불어 오십도 한참 넘은 나이에 미국이민을 갔다가 되돌아와 오늘에 이르렀다.


비요일이라 웹서핑을 다니다 강인수 선생의 글을 접하고는 괜스레 예전 부산시대 생각이 나서 몇 자 첨언...





조이스 캐롤 오츠는 노벨 문학상 후보를 발표할 때면 줄곧 언급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녀는 캐나다 록포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고 재기발랄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도시의 상급 학교로 떠나가자 그녀는 졸업식 날 교실에 혼자 남아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본 학교 관리인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세라비!”라고 위로해 주었다.


“세라비(C’est la vie)는 프랑스어로 ‘그게 인생이야!’라는 뜻이란다.


프랑스인들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양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 올리며 ‘세라비!’라고 하거든.


우리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만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말렴.


그래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차라리 ‘세라비!’하고 웃어넘기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아라.”


그녀는 비록 상급 학교 진학은 하지 못했지만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의 농장일을 거들면서 치열하게 읽고 썼다.


때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지금의 처지가 서러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세라비!”라고 외친 뒤 다시 습작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녀는 <전율하는 가을>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후속작인 <세속적 기쁨이 있는 정원>은 전미 문학 비평가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그녀는 요즘도 이 말을 즐겨한다.


인생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사로잡히기보다 “세라비!” 하고 웃는 순간, 마법이 시작된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