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아시나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동란의 뒤끝이라 내 어릴 적은 대부분이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래도 군내 유지로 기와집 이고서 따시게 살던 측에 속하는 우리조차 그러했다면 다른 가정들은 오죽했을까.
쌀은 턱없이 부족했고 보리농사도 흉작일 적이 많던 그때는 수수며 조 귀리도 귀한 양식감이었다.
구황식품이기도 한 감자와 고구마가 유일한 군것질거리로 요즘은 웰빙식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들이 우리 세대엔 요긴한 주식이자 짬짬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이기도 했다.
집 둘레에 심은 과실나무에서 나는 살구며 앵두나 감 밤에다 뽕밭의 오디가 철 따라 입맛을 다시게 해 주었다.
낙과된 어린 풋감조차 뜨물물에 삭혀 먹었던 그때를 기억한다면 전쟁세대 맞다.
축으로 사 장독에 갈무려 둔 오징어는 심심하면 꺼내 먹는 간식이었다(오징어가 흔해서).
제수용으로 썼던 문어발은 질겅질겅 씹는 맛이 별미였다.
서양감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토마토는 독특한 향에 아직 낯설어하던 때였다.
이른 봄 찔레순을 꺾어먹고 눈 내린 겨울철엔 무광에서 언 무나 고구마를 깎아먹던 그 시절이었으니.
먹거리가 모자라던 당시라 그래서 떡이며 산자가 있는 풍요로운 명절을 그리도 기다렸던가.
이스트 대신 막걸리를 넣고 발효시켜 만든 술빵에 해롱해롱 취해 잠들었던 기억이며.
기름내 풍기며 부침개라도 부치는 날은 마치 생일날 같았다.
어쩌다 서울삼촌이 내려오며 사온 달고도 보드라운 미루꾸 카라멜과 색색이 맛이 다르던 드로프스의 기찬 맛이라니.
동네 점방에서는 기껏해야 파래가 붙은 센베이나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알이 컸던 왕사탕이 고작이었다.
그 왕사탕에 발라졌던 굵은 설탕은 아마도 사카린이었던 듯 거칠한 표면으로 입안이 헤질 정도였다.
껌은 몇날을 두고 씹었으니 잘 때는 바람벽에 붙여두었다가 떼어내 벽지가 붙었건 말건 다시 씹었다.
초등시절, 구호물자를 학교에서 배급받았다.
영어글씨가 잔뜩 쓰인 커다란 통에 든 우유가루나 옥수수가루는 '운크라'에서 제공되는 구호품이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우유가루라는 게 우리 입맛에는 영 생소한 거였다.
그냥 가루를 떠먹으면 밍밍한 데다 걸핏하면 사레에 들려 여지없이 캑캑거리게나 했으니.
당시는 설탕가루라면 굵은 흑설탕이 비싼 값에 유통되었고 사카린조차 구하기 어렵던 시대였다.
연구? 끝에 분말을 되직하게 개어 양은 도시락통에 퍼담은 다음 끓는 밥 위에 쪄먹으면 그런대로 고소하니 간식거리로는 먹을만했다.
가령, 지금 아이들이라면 왜 맛도 없는 그런 걸 먹어? 하겠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한들 이해가 될까.
달콤하니 세련된 온갖 간식류의 홍수시대를 사는 요즘 아이들은 아마도 고개만 갸웃거릴 것이다.
중학생 무렵에 처음 나와 갓 유통되기 시작한 라면은 고등학생이 될 무렵까지 아무나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식품이었다면 눈 휘동그랄 거고.
오래전 시골학교에 근무할 적 일이다.
신평평야 한가운데, 논과 과수원이 많은 지역이었다.
아이들은 철 따라 알 굵고 때깔 좋은 복숭아며 배며 사과며를 종이봉지에 갈무려 와서는 교탁 옆에 수줍게 내려놨다.
결혼으로 그 학교를 떠나던 날 교장, 교감 사택에다 사과 한 상자씩을 전했다.
그땐 왕겨가 든 나무궤짝 사과 한상자면 나름 좋은 선물이었다.
대부분이 부임해서 또는 명절날 선물을 전하긴 하지만 떠나는 마당에 선물이라니..
꽤나 고마워하면서도 한편 놀라워하던 교장부인 표정이 생각난다.
뇌물성이 아닌 순수한 감사 표시였기에 받는 분은 물론 전하는 입장에서도 인정 담긴 나눔이 기쁨임을 그때 느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이라던 시처럼 무어든 주는 것이 더 행복이란 것도 그때 깨우쳤다.
和란 글자는 입에 벼가 들어가는 형상이다.
음식 끝에 정난다던가, 먹거리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고 한결 사이가 돈독해진다.
십 년 너머 살아온 이 동네를 떠나기 앞서 틈틈이 교우들과 이웃들을 만나 더불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식사를 함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느라 요즘 이래저래 날마다 바쁘다.
뉴저지의 이 날도 언젠가는 그리움으로 회억 되겠지.-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