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習)에 관하여

by 무량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데 쇠귀에 경읽기였던가. 만 삼 년 영어공부한답시고 학교 다녔어도 노상 그 타령, 영어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다고 존심 상해할 위인도 아닌 데다 일석삼조의 꿀단지인지라 학교를 등질 수가 없었다. 등하굣길은 영육 간 보화인 하루 한 시간의 규칙적인 걷기 운동과 오롯한 기도 시간을 갖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범생이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던 학교인데 요셉이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뉴저지에서 돌아오자 일상의 리듬이 깨지며 들쑥날쑥하게 되었다. DMV를 같이 가야 하고 병원이나 상가도 앞장서야 하는 등 매사 길라잡이 역할을 해야 하므로 학교를 잠정 중단했다. 안 가 버릇하니 또 그대로 시간은 잘 갔다.


그때부터 꼬박꼬박 매일미사에 참례했다. 아침나절 딴청을 좀 부리다가 어젠 미사시간에 늦어버렸다. 그럼에도 내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정석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교우들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다. 표해두진 않았지만 다들 각기 자기 자리가 있는 셈이다. 은연중 고정석이 되어버려 맨 앞줄은 마리안느할머니 자리, 중간 기둥이 있는 자리는 앨리스엄마 자리, 내 앞엔 기도회장 젬마 씨가 앉는다. 반복된 동작이 하나같이 버릇으로 고착돼 어느 결에 그게 당연시됐다. 하긴 습관이 배지 않았다면 매번 입구에서 어느 자리 앉을까 잠깐 망설이며 고민해야 하리라. 무심결에 길들여져 익숙해 있다는 것은 나름 편안함이기도 하다. 말버릇, 손버릇, 잠버릇처럼. 그렇다 보니 제 버릇 개 주랴(渠所習 不以與狗), 란 속담도 나왔을 테고.



습은 행 (行)의 잠재된 성향 또는 습관을 이른다. 여기서 습(習:익힐 습)이란 한자는 둥지에서 날아오르려 스스로(自->白) 여러 번 연습하는 어린 새의 날갯짓(羽)을 형상화한 글자다. 아기새는 어미새를 따라 나래를 수백 번도 더 퍼득거려 본 끝에야 겨우 날 수가 있게 된다. 관(慣, 익숙할 관)은 心(마음심)과 貫(꿸 관)이 합쳐져, 엽전을 하나하나 꿰듯 마음을 꿴다는 뜻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만큼 수없이 익히고 마음에 새겨 자신의 성정으로 고착시킨 게 습관(習慣)이다. 이처럼 습관은 나도 모르게 굳어진 정신상태이자 행동으로, 일상에서 예사롭고 자연스레 반복되는 행위를 일컫는다. 습관이 성품을 형성한다 굳으면 본질이 된다. 하여 습여성성(習而成性)이란 사자성어도 생겼다. 좋은 습관은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기 위해 갖춰야 할 중요 덕목이자 귀한 자산이다. 어떤 습관이나 쉽게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아예 깃들어 버린 습관은 고치기도 힘들다. 그렇게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되어 한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습관과 연관해서 자주 회자되는 얘기가 있다. 다들 알고 있는 김유신장군과 애마 사연이다. 젊은 화랑 유신이 기녀 천관과 정분이 났다. 무예 연마에 몰두해야 할 화랑이 기녀에 빠져 술집을 드나들자 유신의 어머니가 크게 노해 아들을 나무란다. 유신은 다시는 천관을 찾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어느 날 유신이 아끼던 애마가 말 위에서 졸고 있던 유신을 태운 채로 관성의 힘에 의해 천관의 집 앞에 당도한다. 평소 천관의 집에 드나들던 습관대로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유신은 상황을 알아채고 단호히 애마의 목을 벤다. 이후 학문과 무예에 정진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 중심인물이 된다. 그때 만일 과거의 습을 과감히 끊어버리는 독한 결기가 없었다면 유신은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선생께서 "덕에는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이 있다. 지적인 덕은 타고난 바탕과 교육을 통해 결정된다. 그러나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다."라고 하였다. 희랍어로 풍습, 습관이란 의미인 에토스(ethos)는 윤리를 뜻하기도 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 인격적인가를 가늠케 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평소 습관에서 나타난다.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행동으로 말이다. 습관은 각자의 가치관과 도덕성과 철학을 형성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언어와 글과 행동에 일상 습관이 가감 없이 표현돼 그 사람됨됨이를 파악할 수가 있다. 좋은 습관은 긍정적 힘을, 나쁜 습관은 부정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체적 행동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경향까지 포함해 한번 길들은 습(習)은 차츰 우리를 지배해 종내는 운명을 만든다. 습관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이는 대처여사의 말이다.



습관을 알면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고, 습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기 때문에 삶이 바뀔 수 있다 하였다. 곰곰 짚어 보았다.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은 대체로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된다. 요셉과 사십여 성상을 살아오며 끄떡하면 부딪혔던 일들도 많은 부분 습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화성남과 대충대충을 모르는 금성여의 마찰이었다. 식습관도 천양지판인 데다 하다못해 잠습관도 달랐다. 따지고 보면 별 거 아닌 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들기보다는 생긴대로를 수용하고 그러려니 하면 쉬운 일인데 미련스럽게 그걸 못하고 여태껏 살아왔다. 일등과 꼴찌는 습관이 다르다고 했던가. 기왕이면 다홍치마다. 행복한 여생을 위해 양보하는 습관, 웃는 습관은 물론 매사 감사히 받아들이는 자세까지 습관화시키고 싶다. 2018



*근 십 년 전 글인데 요새 한창 뜨거운 이슈인 대통령선거 어떤 후보의 면모와 겹쳐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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