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안길

by 무량화

왕자 싯다르타는 어느 날 호화로운 궁을 나서서 누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부족할 것 없는 왕궁생활과 뚜렷이 대비되는 비참한 인생고의 실상, 생로병사를 그때 비로소 목격하게 된다. 출가의 계기는 그렇게 찾아왔다. 해탈의 길,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을 찾아 고행의 길로 들어선 싯다르타. 육 년 수행 끝에드디어 보리수 아래에서 正覺을 깨치고 부처를 이룬다.


어두운 철학자라 불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모든 것은 흘러가게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 존재하는 온갖 것, 生이 있은즉 滅은 필연이다. 그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한 것이다. 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에 연민이 깊어진다.


비비안나 자매님이 누워있는 너싱홈을 방문하고 돌아오며 일행은 말을 잊었다. 그저 거친 바람에 술렁대는 裸木 가지만 묵연히 바라보았다. 자신에겐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력감. 헛헛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에 휘둘리며 쫓기다시피 살아가는 하루하루. 그 안간힘이 부질없다 여겨졌다. 애지중지 탐착했던 삶 안의 모든 것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미수를 넘긴 고령의 자매님은 가녀린 하얀 꽃잎 같았다. 누워계신 모습이 꼭 그랬다. 일본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던 예전 자취는 간데없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도 오 남매 강단지게 키운 어른이다. 팔순 잔치 때만 해도 여러 자손에 둘러싸여 소싯적 즐겨 부른 일본 노래를 열창하셨다는데. 흰꽃잎은 이제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다. 가물거리는 기억, 그러나 말은 알아들으시고 주변을 둘러본다. 미미한 동작으로 그렇게 눈을 떠 보이며 당신 아직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알릴 뿐. 손을 움직이는 것 같은 기척에 이불자락을 여니 가슴 위에 포갠 손에 꼭 쥐고 있는 묵주. 묵주는 마지막 기댈 수 있는 단 하나 의지처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머리맡 사진틀의 가족사진에는 햇살 찬란한 행복의 순간이 멈춰있다. 한때 거두고 보살피던 앳된 손주들은 이미 다 자라 각자 제길 가기 바쁠 터. 시간의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흐른다. 나 지금 발 딛고 선 여기 이 자리조차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 곧 무대는 바뀌고 말 것이다. 미구에 우리도 너나없이 뒤안길로 퇴장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세상 인연들로부터 영원히 떠날 날이 올 것이다.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또 어찌해서도 아니 되는 시간의 그 끈. 오직 그것은 우주의 시작과 마침을 주관하시는 분의 고유 몫일 따름. 허락된 시간 동안 역할에 합당이 살아내는 일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임이다.


지구촌 비좁다 누빈 젊어 한때를 못 잊어하시는가, 복도를 무료히 왔다 갔다 하는 할아버지. 휠체어에 앉은 로비의 할머니는 연신 다리를 흔들어댔다. 마치 유년시절 한가로이 나뭇그늘 아래서 그네 타던 추억을 반추하듯. 쉼 없이 노래를 이어 부르는 노인은 차라리 괜찮았다. 어느 방에서는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더 딱하기는 의식 놓고 식물 되어 하염없이 누워있는 노인들.


피돌기가 왕성한 청춘의 푸른 생동감이나 활기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는 곳. 너싱홈에 고인 공기마저 늪지대의 갇힌 물처럼 뻑뻑하게 느껴졌다. 묵직이 가라앉아 있는 시간과의 말없는 대치상태는 누구라도 감당키 어려운 것. 그 숨막히는 지루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꽃잎은 한잎씩 지고 말 것이다. 회복을 기대하기 힘든 노환이기에 ‘병자를 위한 기도’가 허공 중에 겉돌았다. 한 생애 짊어졌던 무거운 짐, 그 수고 끝내고 부르심 받아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천지만물에 섭리하시는 하느님만이 아실뿐.



적막강산이나 다름없이 홀로 누워있는 자매님. 긴 병수발에 지친 소홀함이 아니라 바쁜 이민생활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노환의 가정간호는 한계가 있어 달리 길이 없기는 어디나 비슷하다. 이 상황에서 비비안나 자매님께 기도 외에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 무엇일까. 가족은 물론 이웃들도 당신을 늘 유념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처럼 여전히 세상과의 줄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방문 자주하여 느끼게 해 드리는 것. 무엇보다도 삶의 중심에서 멀찌감치 밀려난 사람,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소속감과 연대감을 갖게 해 드리는 일이 아닐지.



깨어있는 이성의 부재는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없다는 논제를 들어 지난해 한 식물인간 상태의 여인으로부터 영양공급 호스를 제거시켰다. 과연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의 간극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가 있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의미를 잃은 아니, 의미나 의지라는 의식조차 없는 정황에서 단지 숨만 쉬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과연 살아있음의 축복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이 분분했던 그때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동시에 한 기도문이 떠오른다. 회한 없이 미안함 없이 할 만큼 다하고 마지막 미소 지으며 세상과 작별할 수 있기를…200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