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장마 지거나 한바탕 폭우 엄청나게 쏟아진 다음에야 위용 드러낸다는 엉또폭포다.
당연히, 흘러내리는 폭포수야 기대할 수 없는 화창한 일기였다.
비 제법 온 뒷날이라 은근 기대 걸고 갔어도 폭포는 가느다란 실줄기 같은 물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더랬으니까.
그렇거늘 청명한 날씨가 계속됐는데 무슨 폭포가 흐르리란 생각을 하랴.
단지 폭포 위 지형도가 궁금해서 갔던 거였다.
물길이 어찌 났는지, 계곡이 있다면 얼마나 너른지, 혹시 다리가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폭포가 쏟아져 내릴 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무모함이라 기상도 쾌청할 때 일부러 택한 날이다.
원시림같이 울창한 숲 속 깊숙이 자태 비밀스레 숨기고 있는 엉또폭포.
일부러 신비 컨셉을 빌린 건 아니겠지만, 천연 난대림이 넓은 지역에 걸쳐 울울창창하게 펼쳐졌다.
장대하고도 거친 기암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엉또폭포의 규모는 50m에 이른다.
분위기 공포스럽기조차 하던 새벽 시간대와는 달리 대낮이라서인지 압도해 오는 전경 대신 신록에서 녹음으로 넘어가고 있는 울울한 수해(樹海) 일 따름.
몇 번째 방문일지라도 엉또폭포 주변의 경이로움에 기가 질려 묵연히 바라만 보다 돌아섰다.
엉또산장 휴게실에 들렀더니 마침 폭포 영상을 돌려주고 있었다.
양동이나 드럼통으로 쏟아붓는 정도가 아니라 대홍수 때 댐 수문 열어 수천 톤 물을 방류하듯 굉음 울리며 치달리는 폭포.
빗발 성성한 날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엄청스런 폭포, 비바람 거센 날 미친 듯 폭포지며 사방으로 튀는 보얀 물보라.
신사처럼 점잖게 내리는 장신의 늘씬한 폭포, 세 줄로 얌전히 흐르는 폭포와 그 아래 소((沼)도 영상은 고스란히 보여줬다.
전망 좋은 휴게실 창가에서 시원한 바람맞으며 음료를 마시고 내려오니 산장 안주인이 있었다.
나무 평상에 올려놓고 판매하는 하귤을 하나 샀다.
인심 넉넉한 안주인은 방금 딴 비파를 접시에 담아 맛 보라며 우리에게 내밀었다.
황선생은 처음으로 먹어 본 비파를 신기해했다.
광안대교가 내려다 보이는 부산 이모집 정원에는 비파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 터에 빌라가 들어섰지만 당시 윤장군 댁으로 불리던 이모집은 잘 가꿔진 정원수와 연못이 볼 만했다.
치자꽃 필 무렵이면 비파가 눗누렇게 익어갔고 과육 부드러운 비파를 쪼아 먹으려 모여든 새들로 정원 시끄러웠다.
그 생각이 자꾸 나는 것은 엉또폭포 오르는 들머리의 감따남 카페에서 본 보오얀 치자꽃 때문인 듯.
길가 카페 정원엔 하귤나무에 귤이 주렁주렁, 비파나무에도 가지 휘도록 열매 총총 달려있었다.
살구며 복숭아 풋열매도 낯빛 때롱때롱했다.
구좌에 있는 동화마을 수국이며 가든카페 마노르블랑의 잘 가꾼 수국정원 볼만하나 이곳 역시 소담스러운 수국꽃 한창이었으며 절기 잊고 피어난 코스모스꽃 한들거렸다.
하긴 제주섬 서귀포는 어디나 수국이 볼만, 굳이 별도의 수목원이나 카페가 아니라도 도로변이고 골목이고 수국꽃 지천이다.
외진 곳임에도 입소문이 났는지 예쁜 이 카페 앞에도 차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우리는 끝으로, 목적했던 바 엉또폭포 위쪽 지세를 살펴본다고 꾸역꾸역 산길을 올라갔다.
처음엔 제법 희망을 걸고 나선 걸음이다.
그러나 종국엔 허사로 끝났다.
지도만 보며 조붓한 임도 따라서 한참을 산간 외길 걸어갔지만 점점 미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올라갈수록 숲 깊어지며 까마귀 우짖는 날카로운 단음 외엔 산새소리도 잦아들고 점차 사위가 괴괴하게 옥죄어 왔다
무성히 자란 풀섶 너머로 이따금 묵정밭이 망초꽃밭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곶자왈도 아니면서 얼크러 설크러진 잡목들 키대로 자라 밀밀한 숲.
물론 인적도 끊겼다.
아~ 이건 아니다, 란 감이 그제서야 들었다.
기적이 일어나는 때와 장소는 항용 위기 앞에서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만치 집 한 채가 문간에 세워둔 차와 함께 보였다.
빈집이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감지덕지.
막다른 외딴집에서 아낙이 나왔다.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아들도 따라 나오기에 엉또폭포 위로 난 물길을 찾는다고 했다.
엉또폭포 발원지야 한라산이고 악근천 줄기의 하나일 터라 평소엔 건천이지만 혹시 그쪽으로 나있는 길을 아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옆쪽으로 전부 다 울창한 천연 난대림 빽빽해서 길은 나있지 않으며 계속 이 도로로 가봐야 결국은 산속에서 길이 끊긴다고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그쯤에서 주저 없이 뒤돌아섰다.
빠르게 내려오는 산길 좌우로 오월 신록 한층 짙푸르게 펼쳐져 욱욱했다.
하귤나무 그늘 아래 소담스레 핀 수국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