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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30. 2024

캐년랜즈, 그 太山之一角

유타주


소설이나 영화며 각종 미디어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는 무수한 간접 체험을 한다. 반면 삶이란 여정이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맨살로 날것 그대로를 체감하는 직접경험을 하게 한다. 각본도 리허설도 없이 해야 하는 즉석 연기라서 실수가 따르지만 생생하고 싱싱하다. 일회성이므로 긴장도 따른다. 그런만치 조심스럽고 한편 흥분도 느낀다. 미국 내 국립공원 중에서도 거의 대부분이 거친 천연 그대로의 숨결로 남겨진 캐년랜즈 내셔널 팍으로 향하는 동안 기대감이 고조되어 간다. 널리 회자되지 않은 미답의 순결한 지역인 만큼 내 식 내 나름으로 비경들을 가슴에 오롯하니 담아 올 수 있겠다.


1994년 프랑스 남부에서 3만 6천 년 전 선사시대에 그려진 最古의 동굴벽화가 발견되었다. 산사태로 절벽이 무너져 내리며 커다란 암반이 동굴 입구를 막아 수만 년 동안 봉인된 채로 완벽하게 보존된 벽화였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그곳 입구는 은행 금고처럼 잠궈져 있어 접근이 전면 금지되었다. 라스코 동굴벽화보다 두 배는 더 오래전에 그려진 그림들로 인류 문명사를 바꿔 쓰게 한 쾌거로 불린다는데. 바로 그 쇼메 동굴의 암벽엔 멸종된 동굴 사자 매머드 외에 코뿔소 들소 말 그림이 생동감 나게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수백여 점의 벽화 중 겹쳐진 동물이 있는데 맨 나중 덧그려진 그림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5천 년 간격을 두고 그려졌음이 밝혀졌다. 고작 한 백 년 살면서 아등바등하는 인간사일진대 5천 년의 세월이 한 동굴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연속되다니.... 거기서 느꼈던 충격과 전율이 되살아나는 곳이 바로 캐니언 랜즈였다.



사막의 붉은 모래바람을 뒤로하고 애리조나를 살푼 건너뛰면 밀밭 옥수수밭 해바라기밭 푸르게 이어지는 유타 주다. 캐년랜즈로 향하는 끝 모를 유타 여정. 먼 데서 우렛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매지구름이 몰려든다. 누리는 천지 구분도 없이 뭉뚱그려 옅고 짙은 잿빛으로 변한다.
으르렁거리는 뇌성에 연이어 번개가 푸른 섬광을 내쏘며 대지로 곤두박질친다. 하늘이 점점 컴컴해지면서 순식간에 소나기를 내리쏟는다. 굵다란 우박도 섞였다. 돌풍이 거칠게 내달린다. 강한 회오리에 차체가 허뚱거린다. 비바람이 사나운 맹수처럼 포효하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잦아든다. 궂은 날씨가 반짝 개인다. 언제 그랬냐 싶게 하늘빛 푸르르니 개여 멀쩡해진 기상도다. 더러는 여우비가 내리다 금방 햇살 눈부시게 빛나기도 한다. 그렇게 닿은 모압.


모압에서만 4박 5일 머물면 충분하겠지 싶던 일정이나 캐년랜즈의 방대함에 그만 진작 주눅이 든 우리. 지명부터 Canyon에 따라붙은 land에 S가 추가된 Canyonlands이겠나 싶었다. 캐년랜즈 국립공원은 워낙 넓은 데다 거칠어서 오죽하면 세 지역으로 나눠 놓았을까. 콜로라도 강과 그린리버가 합류하는 지점의 북쪽인 Island in the sky, 콜로라도 강 동남쪽의 The Needles, 서쪽 오지로 교통이 불편하다는 The Maze. 그중 째 날은 숙소에서 삼십 분 거리인 '천상의 섬'에 들기로 했다. 겨우 2차선 도로만 내었을 뿐, 후세들이 개발하도록 거의 손대지 않고 남겨둔 미답의 자연은 무한대로 광막했고 황량하다 못해 창망했다.



천상의 섬에 들어 캐년랜즈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고생대니 백악기란 말이 들린다. 어차피 선사시대나 고생대나 계량에 있어 도통 가늠이 안되기는 매일반이다. 공통으로 그저 먼먼 태고적일 따름이다. 백세시대를 구가하며 건강 제일을 부르짖는 현세대의 한뉘조차 얼마나 미소하니 하찮은 숫자인가. 그야말로 九牛一毛요 치열한 경쟁으로 점철된 삶의 양태란 어쩌면 相爭兩蝸角,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다투는 격이 아닌가. 1만 오천 년 전인 아득히 먼 과거,캐년랜즈는 바다가 융기해 해수가 증발하면서 형성된 사암 협곡으로 지세가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무한대이듯 너르고 막힘없이 탁 트였으며 불모지처럼 거칠고 한없이 황막한 땅. 6천 피트 고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시야 곳곳에 널펀펀한 메사와 웅장한 바위기둥과 깎아지른 단애들이 아스라한 지평선 멀리까지 수없이 펼쳐졌다.

 

광대무변 뜻 그대로인 캐년랜즈 진입로를 달리니 속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다. 처음 찾은 곳은 비지터센터 건너편의 Shafer Canyon 전망대. 발아래 낭떠러지는 아찔하니 현기증이 나지만 압도적인 조망권은 최고로 잠시 천상의 섬에 떠있는 감을 맛본다. 다음에 들른 곳은 길 무난한 메사 아치. 일출 사진으로 이미 잘 알려진 메사 아치다. 아치스의 아치들은 색감부터가 고와 여성적인 조각품이라면 메사 아치는 강건하고 무뚝뚝한 남성성을 지녔다. 아치 너머 광활한 캐년도 장관이지만 바로 가까이 보이는 석상은 책상 위에 두 손 합장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간략히 스케치한 것 같다. 풍경 사진작가로 유명한 로드니 러프의 일출 사진으로 두루 알려진 메사 아치 정경은 내 컴퓨터 바탕화면이기도 하다.



곳곳마다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숨겨진 비경들 무수해 다만 두 손 모두어 합장하기 여러 차례다. 발아래 일망무제로 펼쳐진 각양각색의 캐년과 지평선에서 아물거리는 낭떠러지 절벽이며 어딜 가나 만나는 기기묘묘한 바위산들은 경이 그 자체. 그 절경 중 극히 일부인 한 조각만 뚝 떼어다 한국에 붙여두고 싶을 정도였다. 두 시간 하이킹 코스인 그랜드 뷰 포인트에 올라 콜로라도 강줄기가 유구한 세월 동안 이루어낸 기괴스러운 색감의 협곡과 마주하자 숫제 말을 잊고 말았다.


해 그림자 길어진 오후, 시간 반 넘어 쉬엄쉬엄 그랜드 뷰 포인트로 가는 동안 내내 절벽길을 걸었다. 황톳빛 조붓한 길을 따라 크고 작은 돌탑이 묵묵히 길 안내를 해준다. 잘 다져진 등산로에조차 팻말을 세우거나 색색의 리본을 매달아가며 과잉친절을 베푸는 한국식이 민망스러워진다. 가능한 한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는 이런 미국 방식 좀 배워가면 좋으련만. 지구의 끝에 이르는 듯 광활함 자체인 저 아래 캐년. 어드메 짬인가 글렌 캐니언이 이어질 거고 그랜드캐니언도 따라붙으리라. 가장자리에 흰 테두리를 두른 White Rim 벼랑 아래로 사행천 같은 그린강이 보인다. 거대한 손바닥이 평원 위에 연달아 펼쳐졌으며 가르마처럼 똑 고르게 난 길은 실오라기이듯 가느다랗다. 기나긴 일월에 걸쳐진 침식작용으로 생겨난 심연. 게서 울멍줄멍 솟구친 거무튀튀한 돌기둥들은 외계의 풍경처럼 기이하다.



운석이 떨어지며 생긴 아주 독특한 지형이라는 Upheaval Dome 앞까지는 갔다. 그러나 왕복 한 시간이 소요되는 트레일을 감당하기에는 일행 모두 이미 지쳐있었다. 다들 거절의 뜻으로 동시에 고개를 흔들기에 생략하고 돌아섰다. 끝으로 그린리버 전망대에 올라 녹색이 아닌 황토 물굽이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어딘가에서 콜로라도 강과 합류하여 하나가 될 그린리버는 가물가물 소실점으로 스러져갔다. 번번 그러하듯 유구한 광년을 이어온 자연의 위용 앞에 서면 너무나 왜소한 한 점 티끌인 인간임을 절감하게 된다. 유기체인 생명 모두, 저마다 부여받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미세 먼지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마침내 육신은 지수화풍 제길로 다 떠나보내고 검불처럼 가벼이 본향으로 돌아가리니. 그럼에도 안간힘을 쓰고 억지를 부려가며 도토리 키재기질에 골몰하다니.


 


하루는 온전히 천상의 섬에만 할애하였고 이튿날은 니들스로 향했다. 서로 연결되는 도로가 뚫려있지 않아 완전 반대쪽으로 나있는 길을 한참 달려야 했다. 한 시간 이상을 운전해 비지터센터에 거의 이를 무렵, 아차~ 기름을 채우지 않았음이 상기되며 그때부터 다들 긴장모드. 남은 개스를 체크하고 돌아볼 거리 계산을 하니 아슬아슬, 일정을 대폭 축소하기로 한다. 국립공원 경내라 주유소가 들어설 턱도 없는 데다 사막이나 다름없는 사방천지 허허벌판인 곳이다. 길가 좌우로 장대한 암벽 군이 둘러쳐져 있는가 하면 두부 모처럼 반듯하게 깎인 붉은 고원이 여기저기 보인다. 지극히 서부 다운 배경인 뷰트와 메사도 가까이 눈에 든다. 땅에서 불쑥 솟은 지형인데 산도 아니고 바위도 아닌 생경스러운 그것. 원주민들이나 서부 개척시대에는 꼭대기가 평평하니 넓어 가축을 칠 수 있으면 메사(스페인어 테이블), 평원이 쓸모없이 비좁고 뾰족하면 뷰트(butte)라 구분 지었다 한다. 실제 뷰트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인디언 천막집으로 보인다. 저만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무수한 침봉들을 접견하긴 했으그 기기묘묘한 풍광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입장. 차에 주유하는 걸 깜빡하고 온 우리였다. 해서 가까운 트레일로 들어섰다.



길가에 근접해 있는 2.4마일 Slickrock foot 트레일을 오전에 걷기로 한다. 매끈한 바위와 바위가 덧이어진 산정을 타 넘으며 나무 사다리도 두엇 오르내리고 개척민의 흔적이 그을음으로 남은 바위그늘 움집도 지난다. 습기와 냉기가 서린 그곳은 지독스러운 모기 소굴이었다. 오랜만에 모기한테 헌혈도 좀 해줬다. 일정의 하이라이트인 니들스의 침봉을 만나러 가는 길, 흙은 거의 없고 전체가 다 암반으로만 이어져 있는 돌산이다. 그래도 바위 틈새마다 용케 작은 나무들이 자라긴 하는데 분재용 나무처럼 몸통이 꼬이거나 틀어졌다. 집채보다 훨씬 큰 바위에 기어오르자 저 건너 멀찌감치 드러나는 침봉들. 중국식 병풍을 둘러친 듯도 하며 대전 앞두고 전열 가다듬어 깃발 높이 세운 진지와도 같았다. 적벽대전 시의 전운처럼 침봉들 위로 국지성 비구름이 시커멓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간당간당하다 바닥에 달라붙어버린 기름의 눈금이 불안스러워 서둘러 니들스를 벗어나 주유소로 향한다. 비를 품은 먹장구름은 그새 어딘가로 말끔 날아가고 다시 쾌청해진 하늘. 달리는 도중 차가 스르르 멈춰 설 것만 같아 차창가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야를 불안불안 달리고 목장이 있는 들녘을 스치고 밀밭을 지나 마을이 나타나고도 한참만에 주유소가 보인다. 비로소 안심이다. 그 바람에 일찍 숙소에 돌아와 저녁 내내 손바닥 쪼글 대도록 수영장과 자쿠지 번갈아가며 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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