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광화문 광장.
언제부터인가 주말의 광화문 거리는 긴장감이 감돌며 상가는 개점휴업 상태이기 일쑤였다.
차도를 점유한 시위대와 경찰차들이 매번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로구 삼봉로 71(광화문) G 타워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열리는 배냇 모임 세미나 장소에 시간 빠듯하게 겨우 도착했다.
아동권리보장원은 ‘해외입양인 부모찾기’를 담당하는 대표 정부기관이다.
2019년 7월 16일 설립된 기관으로 그럼에도 해외입양인 22만여 명을 아우르는 인력이 고작 다섯 명에 불과하다니.
해외입양인들은 그렇게 친부모로부터, 모국으로부터 방치 아닌 방기를 당하며 외곽 지대에서 지내왔다.
왜 그들은 정부기관이나 홀트회를 제쳐두고 한사코 소규모 민간단체인 배냇에 접속하려는 것일까.
배냇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데는 SNS를 통해 그간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아왔기 때문일 터.
평범한 일반 여성, 공통분모라면 자녀를 둔 어머니들로만 구성된 '배냇 모임'이다.
해외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를 도와주자는 취지로 모인 순수 민간단체다.
70~80년대 갓난아기들이 배냇저고리 차림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비행기에 태워졌다.
배냇을 알기 전에는 한국동란 이후의 혼란기에 양산된 전쟁고아들만 해외로 입양되는 줄 알았다.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 대한민국은 눈부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와중 이런 응달진 구석이 공존했고 불행한 운명이 적잖았던가 싶어 내심 놀랐다.
해외로 입양돼 모국을 떠난 아기가 자라, 가족과 다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다가 스스로 뿌리 찾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요?
자신의 흔적을 찾아 나서나, 입양 서류에 기재된 정보는 엉성하기 짝이 없어 정확한 존재 증명을 보장받기 어려웠다.
배냇저고리 품섶에 생일과 이름을 남겨놓았다 하더라도 일원화되지 않은 행정상의 난맥으로 그조차 부실하거나 유실되기 일쑤.
신원확인부터 쉽지 않은 것은 보호시설이나 고아원을 거치는 동안, 기록물을 편의상 일원화시키거나 불성실하게 기재한 탓이다.
그렇게 첫 관문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는 여정은 이처럼 굽이굽이 험난하기만 하다.
천신만고 끝에 어렵사리 생모를 찾는다 해도 재회하기까지에는 첩첩산중을 지나야 한다.
연락이 닿아도 아예 응답이 없거나 만남 자체를 원치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를 묻고 새 가정을 꾸려 가족이 생긴 경우라면 사오십 년 전의 과거사가 당황스럽고도 난감하기 그지없을 게다.
배냇모임 현 대표는 2018년 미국에서 지낼 당시 알게 된 한국계 입양인이었던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생모를 찾고 싶다는 친구의 간절한 청을 계기로, 그녀를 돕기 위해 입양 과정에서부터 실마리를 더듬어 나갔다.
당시의 여권 사진과 한국 이름 및 출국일 자료만 들고 대구 시청과 보육원 등을 샅샅이 훑은 결과 3개월 만에 흔적을 찾게 됐다.
비록 친모는 세상을 뜬 뒤라 만날 수 없었으나 한국을 방문한 친구는 “다른 해외입양인들도 꼭 도와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거기서부터 배냇은 출발했다.
수십 년 의문부호로 떠돌던 자신의 뿌리,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입양인들은 세계 각처에서 정보의 장을 서로 공유하며 소통하고 있었다.
배냇의 문을 두드리는 그들과 하나씩 연결해 나가다 보니 고구마 줄기처럼 여러 케이스가 딸려 나왔다.
사실, 수십 년 세월 동안의 거리감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쌓인 마음속 앙금을 녹이는 일이 마냥 순조롭다거나 그리 아름답다고는 하기 어렵다.
아무리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해도 형편상 친모가 한사코 만남을 거부해 상봉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언어와 문화 장벽으로 한번 만남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지극히 비정한 부모도 가끔 있어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더러는 기적 같은 핏줄의 당김으로 만남의 장소가 순간 그대로 눈물바다 된 사연도 숱하지만.
누군가의 잃어버린, 혹은 삭제된 생의 일부를 되찾아주거나 복원시켜 주는 과정에서 느끼는 뿌듯한 보람만이 아니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나무에게 든든히 정착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푸근한 고향이 되어주는 일, 그것이 배넷의 지향점이다.
입양인과 친생모 상봉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며 그들에게 고향 언덕이 되어 푸근히 맞아주는 일.
캄캄한 바다를 헤매던 그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돼주는 게 배넷의 최종 목표이다.
금번 세미나 참석자들은 배냇 회원 외에 네덜란드로 입양된 여성과 한국에서 입양인으로 자란 중년도 자리를 같이하였다.
생모와의 재회 후, 길러준 부모에 대한 미안함으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은 바 있는 40대 여성의 진솔한 사례 증언은 가슴 뭉클했다.
그 외에 친자를 해외입양시켜야만 했던 부모, 현재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한국인 엄마의 씩씩한 발언도 감동이었다.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이던 AP 통신사 기자와 사진기자, 《K-넘버》 다큐 감독의 카메라도 내내 묵직했다.
세미나 첫 순서로 해외입양인 가족 찾기 미니 다큐가 상영되었다.
케이스마다 절절한 사연을 품은 해외입양인의 가족 찾기 다큐를 30분가량 시청했다.
이 영상은 배냇 초창기 멤버인 이 현희 회원이 현장에 가서 직접 두 발로 뛰면서 촬영 편집하였다.
곧이어 '해외입양인과 친생모간 재회 결정의 어려움에 대해:트라우마와 치유의 관점에서'란 주제로 신필식 박사의 강의가 있었다.
신필식 박사는 해외입양 연구로 여성학 박사 학위를 최초로 받은 남성이기도 하다.
여러 기관의 자료와 당시 신문기사를 취합해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한 강의였으나 동시대를 살아온 나조차 낯선 내용 투성이었다.
육이오동란 이후 거지와 고아가 들끓던 50년대라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70~80년대에 이르러 해외입양아가 폭증했다는 게 도시 어리둥절할 정도였으니까.
정부기관과 입양기관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50년대 2천5백여 명이던 해외입양 아동수는 1960년대 7천2백여 명으로 늘었다.
여기까지는 수긍이 되나 1971년도부터 1980년까지 그 숫자는 폭증해 무려 48.247명이 해외로 입양돼 떠났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1981년에서 1990년 사이에는 66,321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부모 품을 떠나고 모국 품마저 떠나야 했다.
이게 웬일? 전쟁의 참화 속 모든 물자가 부족해 처절한 궁핍에 허덕이던 세월도 아니다.
포화로 삶의 터전이 전부 잿더미가 되어 희망 잃고 의기소침에 빠졌던 시기도 아니다.
'잘 살아보자'는 열망 하나로 짓눌렸던 가난에서 벗어나 산업사회로 힘차게 질주하던 국가 부흥기인 때가 아니었던가.
공장 핑핑 밤낮없이 돌아가고 술집이 독버섯처럼 끝없이 솟아나던 때, 하루 멀다 하고 최루탄 연기 자욱하던 그 시절에 무슨 일이?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싸았다'는 유행가 가사 대로인가.
바로 그 시절에 발생한 일들이니 인과관계가 더더욱 명료해진다.
당시에도 물론 미아 발생에 의해 또는 너무 가난해서 입 하나 덜려고 자식을 포기한 사람도 있을 터이다.
생활고에 시달려온 빈곤한 모자가정, 대책 없는 미혼모 가정에서 그처럼 많은 수의 입양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 이면에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황금만능주의와 도덕불감증 내지는 윤리 부재의 쾌락주의도 큰 몫 했을 게다.
게다가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은 아동 유기 현장에도 적용돼, 막대그래프를 보니 여아 비율이 남아보다 현저하게 높았다.
막상 핏줄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각각의 기막힌 속사정이야 분명 있으리라.
모든 이별과 상실이 그러하듯 그들 역시 누구보다 뼈아픈 이별을 이 악물고 견뎌냈을 것이고 상실의 고통도 처절하게 겪었으리라.
자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도 상상과 편견으로 낙인찍어선 안될 우리와 마찬가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보통 인간일 뿐이다.
다만 육아를 하기엔 여건과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자기 혈육을 어쩔 수 없이 방기 할 수밖에 없었던.
해외 유명지 탑 기사를 통해 한국은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을 쓴 시기도 있었다.
실제 그 당시 매년 4~6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돼 나갔다고 한다.
그때 해외로 떠난 입양인들이 생모와의 만남을 꿈꾸며 한국에 오나 실제 찾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험난하다.
거기다 재회한다 해도 상실의 재경험에 더해 깊게 골이 팬 상처의 치유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 혹은 집을 잃고 미아가 되어 떠돌다 고아원에서 해외로 입양돼 간 아이들.
사오십 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그새 입양아가 성장해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직접 뿌리 찾기에 나선 경우, 홀트아동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를 두루 돈다.
먼저 해외입양기관을 찾아가나 오래 전의 기록철을 찾기란 쉽잖다.
거기서부터 막히며 꼬인 실타래는 풀려나가질 않는다.
생모를 찾고자 한국에 왔으나 길이 보이지 않자 나르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종당엔 언론사와 민간단체에 의뢰하기도 한다.
비행기에 실려지며 지니고 있던 본인 사진 외의 입양정보를 공개 청구할 수가 있게 법제화되자 2012년 연간 258건이나 접수되었다.
그러나 친모의 소재지가 확인돼도 사망, 거부, 무응답 등으로 만남 자체가 이뤄지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는 예가 많았다고.
2021년 현재는 1327건으로 2019년 2175건보다 주춤해졌는데 아마도 코로나 영향 때문이라 사료된다.
한 명도 못 되는 0.78명이란 수치가 보여주듯 심각한 출산율 감소로 한국은 인구절벽을 우려하기에 이른 작금이다.
그 반면 최근 영아살해 사건이 빈번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수본에서는 출산 기록은 있으나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이른바 ‘유령 영아’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기독교 단체에서 오래전부터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인 베이비박스를 운영 중인데 이번에 재조명을 받게 됐다.
이와 관련,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부에 베이비박스를 금지하도록 권고한 바도 있다는데.
여러 찬반 논란 속에 무인가로 운영되는 이 시설에 아기를 유기할 경우 형법상 영아유기죄 성립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 들이다.
생명권은 인류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인 바, '영아 유기 조장'이라는 측보다는 '영아의 생명 보호'에 무게 추가 기운 듯하지만.
존재의 본질인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그나마 목숨을 건졌기에 입양도 되고 시설의 보호를 받으며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미래도 기약할 수 있지 않은가.
해외로 입양되어 떠났던 이들이, 물음표로 떠돌던 탯줄의 시원을 찾아 모국으로 돌아들 오고 있다.
이에 손 내밀어 작은 도움이나마 나눌 수 있다면 그로 충분히 배냇은 만족한다.
시작은 미약하나 점진적으로 활동 뻗어나가 배냇 모임 역시 창대하게 큰 숲을 이루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