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심상치 않은 비바람 소리에 간밤 잠을 설쳤다.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창문. 금세라도 창틀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요란하다. 깨어진 유리조각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헤매고 다니듯 밤새 천둥 번개는 잇따랐다. 인광인양 비수인양 시퍼러이 금을 그어대며 하늘 가르는 뇌성벽력. 빛으로 소리로 장악하는 천지.
희뿜하니 동녘이 터오건만 위세 눅을 성싶잖은 폭풍우. 늦은 봄 끝머리를 동강내며 진군하는 철 이른 태풍의 내습이다. 태풍권에의 진입에 앞서 치르는 전초전 격인데 기세가 엄청나다. 연습치고는 대단한 위력을 보인다.
창가에 서니 바람이 보일 듯하다. 창에 부딪혀 우우 포효하며 냉소 띤 얼굴 이개는 바람. 철책에 갇힌 늑대의 절망적인 울부짖음이다. 괴괴한 서낭당에 떠도는 귀신 울음소리다. 산발한 광녀처럼 사납게 회오리쳐 맴돌다 마구잡이로 두드리는 창. 그때마다 작두 위에서 춤추는 무당의 쾌자자락같이 신들린 듯 날뛰는 바람.
예닐곱 쯤이었던가. 무섬증 반 호기심 반 까치발 딛고 송판 담장 틈새로 본 무녀의 춤이 생각난다. 살푼살푼 정신이 가곤 하던 과수원집 여자가 있었다. 골방에 갇힌 그녀는 시집에 떼 놓고 온 아기 이름 부르며 가슴 풀어헤치고 울다 웃다 한다 했다. 그녀로 인해 가끔 벌어지던 굿판. 신 내린 대나무 잡고 기세 좋게 겅중겅중 뛰어오르던 무녀는 주문을 외우며 휘파람을 불고 호령하다 울고……
그랬다. 둥둥 가슴 울리게 하는 북소리. 짤랑거리는 요령소리에 맞춰 입심 좋은 무녀는 한밤 내내 지치지도 않고 청홍의 옷소매 나부끼며 춤추다가 팔을 흩뿌리기도 하고 무쇠 칼을 내던져 꽂기도 했다. 추녀가를 핥듯 날름대던 화톳불. 마침내 그 불에 제웅이 던져지면 극에 달하던 무녀의 춤사위.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이며 신명 나던 그 춤사위.
일순 폭풍마저 아름답다 여겨진다. 美란 주관 중심. 내 쪽에서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은 비례 조화 관계없이 아름다움일 수 있는 것. 비극미, 장엄미, 백치미처럼. 그래서인가 더욱 기고만장 덮치는 야성. 긴장으로 생침이 넘어가고 홀연 바람은 갈매기가 된다. 무리 진 갈매기. 잿빛 갈매기 떼. 진노하며 열광하며 몰아의 상태로 오직 낱낱이 부서져 흔적 없이 날리고자, 無로 돌아가고자 함인가. 끼룩대고 너울대며 격렬한 날갯짓도 섬뜩하게 예리한 부리 앞세우고 떼 지어 날아드는 갈매기떼.
성난 위세 그대로 내달리다 창에 부딪혀 죽지 상하고 깃 갈가리 찢겨 이윽고 추락하는 새. 그래도 겹겹으로 다가와 다시 쓰러지는 무모함쯤 마다하지 않는다. 잘려도 잘려도 솟아나는 메두사의 머리인가. 다부진 기세로 위협하듯 달려드는 그 공포의 광기는 숙여질 것 같지 않다. 숨 가쁜 자진모리로 굽이 틀다 예리한 빛의 창 끝에 찔려 움칫하는 폭풍의 눈.
하늘은 내내 불손하고 불안하고 막연하다. 속수무책인양 두 어깨 낮게 떨구고 산에 기대 선 하늘. 바람의 반란에 밀려 숲은 기진한 채 맥이 없다. 모진 무서리에 누운 고추밭 꼴로 폭풍에 뒤채이다 쓰러진 숲. 그러나 태양은 다시 그들을 불러일으키리니. 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바람의 넋두리. 애원하다 호소하다 몸부림쳐 곡하는 바람. 구천 헤매던 한 맺힌 넋이 뼈아픈 통한으로 내지르는 신음인가 절규인가. 바야흐로 제풀에 서러워져 아픔이 다시 더 큰 아픔을 낳는, 절규가 보다 더 큰 절규로 이어지는.
비안개 흩날리며 바다 쪽에서 여전스레 몰려드는 바람. 눈자위 마구 굴리며 바람은 도통 거칠 것이 없다. 허공 중에 땅 위에 무자비한 폭군으로 걸리적거리는 모두를 동댕이치고 짓밟으며 내닫는다. 때로는 무섭게 휘감아 오르고 어느 땐 난폭히 태질하는 바람. 걷잡을 길 없는 함성. 막무가내의 광증. 도저히 다스리지 못할 격정. 마침내 절정 깊숙이 파고드는 은장도. 그렇게 종당엔 유리 앞에 굴복하는 바람. 투명이 투명에게 먹히고 있다.
허황스레 감성에 키질당하던 삼십 대 중반 무렵. 나는 바람이고자 얼마나 갈망했던가. 인연의 매듭으로도 얽어맬 수 없는 바람이고자 했다. 자유롭고 싶었다. 날고 싶었다. 훨훨 거침없이 매임 없이 자유로이 날고 싶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묶었던가. 오히려 스스로가 지른 빗장이었고 자신이 얽어맨 결박이었다. 결국 구속이며 속박은 어디에도 없었다. 형체 없는 마음을 누가 어떻게 묶으랴. 깨우침까지의 긴 방황. 폭풍과 동행했고 해일도 넘쳐 났던 혼돈의 그 밤은 지나갔다.
이젠 당당히 폭풍에게 명령할 수 있다. 아침이 밝아온다, 그만 悟性을 일깨우라고. 차츰 기세 눅어지는 바람. 악몽 같던 밤이 접히자 시야 트이며 오월 장미 붉게 져 낭자한 거리가 보인다. 등교 길의 아이들도 눈에 띈다.
나는 더 이상 바람이길 원하지 않았다.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