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1990

by 무량화


낮에도 불을 켜야 되는 방이 하나 있다는 건 어쩌면 일종의 구원이리라. 미세한 빛의 여운조차 닿지 않는 어둠침침한 방에 눕는다. 그러고도 이불자락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긴다. 될수록이면 무거운 이불이 좋고 폭신한 요가 또한 좋다. 가능한 대로 어떠한 소리도 없앨 것. 더욱 깊이 잠들기 위해서이다. 더욱 완전히 떠나기 위해서이다.



온갖 세상사 잊어도 좋은 아늑한 침잠, 완벽한 격리. 신의 축복 중 가장 흔쾌한 여행인 잠이다. 그 여로에 오르기 전 동행할 것이 하나 있다. 중량 가벼운 책을 수면제이듯 여나믄 페이지 흡수해 들인다. 마취당하는 순간의 혼미한 기분 같은 것이 나른히 기어들어와 달콤히 젖어드는 잠.



아무런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는 무기력한 때가 있다. 분명 해야할 일 두서없이 기다리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적의 초조와 심란함. 특히, 자주 만나게 되는 좋은 글들. 넘보지도 앞서지도 못하는 세계로 인한 위축감은 참으로 떫다. 그러나 다른 글과 키 견주지 말고 내 세계를 보다 확충 심화시키고 모름지기 자기 색채에 더욱 충실해질 일이건만. 꾸준히 정진해 볼일이건만.



끝없는 시도. 끝없는 도전. 끝없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끝없음의 무궁한 여백. 더욱 깊이 수련하고 부단히 깎아 내며 명료히 깨어 있어도 시원치 않은데 속 편히 느긋한 낮잠이라니. 모두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들 간다. 열심히 맹렬히 뛰고들 있다. 살아있음의 신호를 보내며 제각기 띄우는 저 무수한 음표들.



과반수 이상이 중산층이라 자부하는 이 시대의 어중띤 소시민인 나. 하나 엉뚱하게도 선망하는 바는 富가 아닌 도자기 가마를 갖고 있는 S선생이었다. 화가의 아내인 시인 P여사나 마흔 넘어 대학원에 도전한 Y여사였다. 뒤늦게 유아교육 공부해 유치원 개설한 S여사였다.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J선생이었다. 카프카에 심취한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난해한 카프카와 씨름하느라 머리가 세었다는 K선생이었다. 그리고 또….


나이 든다는 것은 분명 늙는다는 의미만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나는 지각 드는 대신 정작 심통 사나운 객기만 느는가. 이미 가능성이 희박한 일, 소유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여우의 신포도를 생각키로 한 것이다. 내 손에 안 닿는 저 포도는 신포도이리라 타박하고 짐짓 포도원을 외면하던 이솝우화 속의 여우처럼. 체념하기엔 왠지 허전하고 달관하기엔 너무 모자람 투성이고 그렇다고 초연의 경지까진 더더구나 어림없는 탓일까. 그러면서도 손톱 아래 든 가시와 같이 문득문득 자신의 나태와 침체가 아프게 욱신거릴 때 차라리 나는 그 방으로 스며 들어간다. 그리곤 잠이란 안식 가운데 온전히 내 정신을 누이는 것이다.



참으로 비겁한 도피이고 은둔이라 비웃어도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레 나는 내식대로의 처방전에 수정을 가하고 싶지 않다. 하많은 언어의 빛 부신 성찬 앞에 오히려 나는 거북이마냥 무감각의 등피 들쓰고 목도 손끝도 숨기고 싶은 것이다. 아니 곰이나 개구리같이 깊은 동면에 들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의식을 잠재우며 보다 영원히 깨어 있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흙탕에 발 딛고 서선 창 밖의 별만을 바라보며 손 안 닿는 저 높은 곳에 건 꿈 한 자락. 하여 청자의 翡色같은 삶을 소망하며 분수 밖의 것을 곧잘 탐하는 나. 실상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얼마나 한 용기가 필요한지. 어느 날 법문을 들으며 空이란 집착을 버리는 것,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란 말에 크게 고개 끄덕였지만 세간의 범속한 아낙이 어찌 감히 그 경계를 바라랴. 해서 백치처럼 실없는 낮잠이나 잘 밖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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