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주의보

1989

by 무량화

새벽. 창문을 여니 하얗게 밀려들어오는 안개. 더불어 물이끼 내음도 같고 젖은 솔잎향도 같은 안개 냄새가 스민다. 아주 은근하게 오관을 자극하는 그 녹녹한 습기. 나직나직 속삭이며 고요히 움직이는 낮고 작은 흐름. 미세한 몸짓에 그만 묶이고 마는 나. 드디어 덫에 걸리고 마는 나. 안개의 덫에 걸린 것이다.


환각에 빠지듯 몽롱히 취하게 만드는 안개의 덫. 하지만 시공 자재로이 넘나드는 환상의 여행으로 속박마저 아름다움인 것을. 인더스 강가의 사리 두른 여인이었다가 상달제 지내는 아득한 고대의 여인도 되는 신비를 어찌 시도 때도 없이 누리랴. 집 옆 훤칠한 미루나무조차 아스파라거스 잎 곁들인 안개꽃 한아름으로 내게 온다. 아직 내리지 않은 가로등 달무리 지듯 아스름한 빛의 테 두르고 아침을 깨울 새소리는 자욱한 눈밭에 그만 갇혔는가. 도시는 안개에 묻혀 폼페이 유적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꿈을 꾸고 있다.


놀라운 묘기. 안개는 처처에서 변신을 한다. 이렇듯 노상 보던 풍경도 아른거리는 모시발 드리우니 한결 은근스럽다. 뒷산은 아예 자취조차 杳杳하고 네모 반듯 각 이룬 슬래브 지붕의 윤곽마저 아주 부드럽게 보이는 이런 날. 불현듯 만나고 싶은 게 있다. 안갯속에서만은 눈빛 때롱때롱 영악해야 하고 첨예히 날 세워야 하는 세상사 대신 소박한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들과 만나고 싶다.


부석사 가는 길, 어느 화전의 메밀꽃 흰 파도 그리고 자색 도라지꽃의 나부낌.
천주교도의 순교지였다는 해미읍성, 거기에 승천하는 백의이듯 하늘거리는 망초 무리.
경산 인근 고속도로변, 蓮塘아닌 연밭일지언정 밀밀한 푸른 잎새 사이로 소롯이 핀 부용의 기품.
항상 물 흐르고 꽃이 핀다는 조계산 자락 조그만 임자에 피어있는 난초꽃 푸른 물결.
연연한 그리움 품고 이울어 갈 고향 뒤뜰의 자귀나무꽃.


그들은 지금 당장 손 흔들어 안부 물을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으므로 더욱 절절한가. 그때 문득, 달빛 아래 보다 더 처연하던 새벽녘 달맞이꽃이 떠올랐다. 산사로 약수 받으러 가는 언덕길. 풀섶 칡덩굴에 가려 노란 꽃 아니었다면 영영 혼자 피고 졌을 달맞이꽃. 무성히 키 돋우고 피워낸 꽃잎들 저마다 오롯이 밤을 영접하는 달맞이꽃이다. 그러나 아침해 맞으면 이윽고 저버리는 그 꽃을 만나보러 가려고 새벽이면 動悸마저 느끼며 발길 서두르던 나. 빠르게 쌀 안쳐 밥솥을 누른 뒤 물병 헹구어 담고 바쁜 걸음으로 안개를 헤쳐 나갔다.


구름이듯 휘감기고 비인 양 적셔지며 내게 몸 부딪는 안개. 안개는 어쩌면 청산 노닐다 하강한 구름이던가. 낮게 아주 낮게 수평으로 흐르는 細雨이던가. 천지사방에서 나긋나긋 조여드는 그 감촉이 더할 수 없이 유순하다. 연인과의 약속이 이만큼 설렐까. 괜스레 미소가 번지고 노래조차 입가에 감돈다. 자연 가벼워지는 발길. 팔이라도 한껏 내젓고 싶다. 하지만 새벽안갯속에 헤실헤실 노래 흘리며 걷는다면 자칫 정신 나간 여자로 오인될 터. 들뜬 감정 짐짓 다스리고 부지런히 산기슭을 올랐다.


제법 숨찰 만큼 한 높이이지만 전혀 내 힘으로가 아닌 안개에라도 떠밀린 양 단숨에 나는 달맞이꽃 앞에 섰다. 시야에 안기는 것은 오직 노란 나비 떼의 군무뿐. 차마 견딜 것 같지 않은 밤의 무게 고이 받들어 지새우고 새벽이슬에 그만, 겨워 떠는 달맞이꽃. 마침내 아침 맞아 옷깃 다독여 갈무리고 한 생애 곱게 접을 달맞이꽃. 지척 분간 못하게 뽀얀 안개로 그 밖의 모든 것과는 막막히 단절된 채 우주에는 다만 나와 달맞이꽃뿐이었다. 떨리는 우리의 눈 맞춤 그리고 격정의 한 순간. 꽃과의 교감 순간에 느끼는 경외심이라니.


거기 혹해 옷 젖음도 잊고 빈 병의 목마름도 잊고 아침시각의 화급함도 잠시 잊었다. 한참을 그렇게 섰다가 구르듯 내려와 황망히 설쳐야 했던 어느 안개 깊던 날. 아침밥도 제대로 못 챙기고 아이는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야 했으니. 이후 일기예보에서 안개주의보라도 내리는 날이면 나는 아예 절제 힘든 감정 기상도에다 빨간불을 켜놓는다. 연안 여객선도 뜰 수 없고 비행기도 이륙이 금지되듯 그 경보 신호에 내 발목을 미리 묶는 것이다.


요즘은 자주 깊은 안개를 만난다. 실바람에도 나는 민들레 씨앗은 안개 드리운 날 무거워진 나래 접고 무슨 생각할까. 자욱한 안개에 바람마저 젖는 새벽이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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