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으로 명칭 되돌아가기 전.
젊은 시절 창경원은 동물원이었으며 밤 벚꽃놀이 장소로나 알았다.
이 얼마나 모멸스러운 처사인가.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를 통째로 능멸하며 비틀어버린 일본이다.
그네들 음흉한 교활함의 극치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일이 아닐지.
조선을 이조시대로 격하시켜 끌어내리고 그도 모자라 바닥에다 내동댕이 친 현장이 창경원이었다.
종묘사직은 물론 왕실 내밀한 생활공간을 제멋대로 해체시켜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시켜 버린 그들.
동물원 우리에 가둔 동물들처럼 말이다.
한국동란 후, 하루 세끼 겨우 해결해 나가기 급급한 데다 몽매함에서 의식 깨어나지 않았던 당시.
우리가 여기서 재주 부리는 원숭이나 화사한 벚꽃에 취해 희희낙락할 때 저들은 얼마나 경멸의 눈길 보냈을까.
농락당하는 줄도 모르고 꽃놀이 나선 우리를, 그야말로 '뭣도 모르고 놀고 있네!' 비웃었겠지.
제대로 되갚음하는 길은 그들을 훨씬 능가하는 국력으로 세계 속에 태극기 휘날리는 일, 냄비 끓듯한 반일감정이 아니라 극일뿐이다.
창경궁에서 더욱 그 마음, 그 결기 다져진다.
창덕궁에서 창경궁 들어오는 초입 왼쪽 언덕 위 숲에 자경전 터 안내문만 휑뎅그렁하다.
야트막한 언덕에 잡목숲, 위치상으로는 창경궁이 내려다 보이는 최상의 자리인데 어쩐지 빈 터로 남겨진 게 의아하더니만...
내내 애연했던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거처로 지어진 자경궁이 있던 곳이다.
허나 자경궁은 고종 때 경복궁 복원에 쓰려고 헐어버렸다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 지극했던 정조가 혜경궁을 위해 동쪽 멀리 보이는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다는 자경궁은 그렇게 사라졌다.
인근 성종 태실(태를 묻어 기념했던 석조 조형물) 및 태실비만 눈길을 끌었다.
화살표 따라 저 아래로는 푸른 연못 춘당지, 애초엔 농사짓는 의식을 행하던 논이 있던 자리였다고 해설문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논농사 시연하던 곳에서 크고 작은 연못이다가 망국의 세월에는 유원지 뱃놀이터로 바뀌었으나, 이젠 오욕 씻고 섬 하나 띄운 전통양식의 연못으로 가꿔놓았다고.
창성하여 경사스러우라는 염원을 담아 창경(昌慶).
조선 왕실 가족이 거처하던 궁이 무람없이 뭉개지며 창경궁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이후까지 설운 역사를 이어온 궁궐이 되고 말았다.
그렇듯 창경궁 왕가의 역사는 화려하긴커녕 아리고 지난하기만 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잦은 화재 등으로 오백여 년 간 온갖 풍파 겪으면서 시련 견뎌가며 명맥 이어온 창경궁.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1483년 성종에 의해 세워진 궁궐이다.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거주공간으로 마련된 창경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지내던 수강궁을 확장해 정식 궁궐로 만들었다.
태종이 누구인가, 아버지를 도와 조선개국을 위한 혁명에 앞장서며 피바람을 일으켰던 야심만만한 이방원.
왕자의 난까지 벌인 그는 열여덟 해 왕위에 있다가 세종에게 옥쇄를 물려준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그가 말년을 보낸 수강궁은 바로 창덕궁과 곧장 이어져 있는 위치다.
상왕이 되고도 4년 여 국정을 감독하였을 뿐 아니라 병권과 인사권 틀어쥐고 살다가 그는 56세에 헌릉에 묻혔다.
왕가의 맥을 잇는 궁궐이라서 살(煞)을 피하고자 기와지붕 머리에 늘어 세운 어처구니라 불리는 잡상이 겹겹의 지붕 사이로 도드라져 보였다.
살을 막기 위한 토우만으론 역부족이었던지 숱한 벽사에도 불구하고 궁중비화 무수하게 새겨진 창경궁.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 앞을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장소로 활용한 임금이 있었으니 영정조 재임 당시의 일.
영조는 균역법 시행을 앞두고 "내 앞에서 각각 생각하는 바를 말하여 물러난 다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공포했다고 왕조실록에 쓰여있다.
정조는 '홍화문사미도'란 그림대로 어머니 회갑을 맞아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정문에서 금천교를 지나면 정전으로 들어가는 명정문이 나온다.
똑 고르게 박석이 깔려있고 양편으로 품계석이 열 지어 서있는 저 끝에 뭇 전각 거느리고 명정전이 우뚝 솟아있다.
400년 세월의 연륜이 겹 포개진 까닭에 명정전 건물은 낡은 데다 단청도 색깔이 바래 전체적으로
고색창연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한층 더 국보급의 무게감이 느껴졌고. (국보 제226호)
최상의 도슨트 격인 설명문을 찬찬히 읽어내리며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
다른 궁궐의 정전은 남향인데 반해 방위를 동쪽으로 정한 이유는?
역대 왕의 사당인 신성구역 종묘가 창경궁 남쪽에 위치해 부득이하게 동쪽으로 전각배치를 했다고 한다.
계단 위 높직이 정좌한 명정전은 신하들의 하례를 받거나 과거시험 또는 궁중 연회 같은 공식 행사가 치러지는 정전이다.
밝은 정치를 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긴 이름인데, 그에 맞갖게 나라를 제대로 이끈 조선 군주가 과연 몇이나 됐던고?
이 땅의 기운이 그러한지 어찌 보면 지도자 복 지지리도 없는 백성들 같기만.
예약문화가 아직도 배어들질 않아 현장에서 즉석 표를 구입하는 아날로그 세대다.
그렇다보니 비원 입장시간까지 한 시간 여가 남았기에 막간을 이용해 이웃집인 창경궁으로 나들이를 온 터다.
마침 창덕궁은 창경궁과 담장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돼 있기에 가능한 나들이였다.
궐내 여기저기엔 한복 곱게 차려입고 산책하며 사진 찍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마치 봄날 궁전 후원에 피어난 모란꽃같이 그들은 화사했다.
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반열의 대비를 모시려고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창경궁.
하긴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완전 소실된 까닭이기도 했지만.
특히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정전(正殿)으로, 국왕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다.
명정전 가까이 남쪽에 있는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논의하고 경연을 베풀던 곳으로 북쪽 중앙에 옥좌가 놓여있다.
편전 옆에 선 숭문당 분위기도 문정전과 흡사했다.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던 공간다이 글월을 숭상하는 집이다.
매일매일 경연을 벌였다기에 일삼아 재주를 겨루며 놀았다는거야 뭐야? 싶었는데 임금이 신하들과 유학의 사서를 더불어 논하거나 국정의 주요 현안을 의논하는 장소였던 것.
또한 이곳이야말로 비극으로 각인된 조선역사 하나를 복기시키는 현장,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이 염천 한복판에 여기서 벌어졌으니.
영조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추상같은 엄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있다가 더위와 허기에 지쳐 여드레만에 목숨을 잃는다.
사도세자는 문정문을 지나 담장 하나로 궁궐 밖이 되는 선인문을 통해 시신이 내쳐졌는데 이 문으로 연산군, 장희빈 등도 궁을 떠났다.
인을 널리 펼친다는 이름과는 영 다르게 쓰인 문안에는 뼈대 비틀린 적송과 주목만이 허허로이 솟아 있었다.
홍송과 참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가 우거져 숲이 유달리 아름다운 창경궁이라는데....
그림 <동궐도>에도 나와있는 향나무는 19세기에 식수한 나무라고 하였다.
왕과 여인들의 사적 공간인 내전.
명정전 뒤편에서 벽이 없는 복도 천랑을 통과해 빈양문에 이르렀다.
문을 나서자 함인정이 사방 시원스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함인정에서 마당을 가로질러가면 만나는 환경전.
중종이 승하한 장소이자 성종의 어머니이며 숙종 비인 인현왕후가 한 많은 생 마감하자 빈소 역할을 한 빈전이었다고.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전각이름과는 달리 여기서도 하늘 무서운 비사가 또 발생했으니.
조선 왕실의 무참스런 비극이 일어난 역사현장인 이곳.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치욕스러운 삼전도의 굴욕 이후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볼모신세를 면하고 환국, 창경궁 환경전에서 지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피를 토하며 시신은 검게 변한 채로 의문사한 소현세자.
광해군이 못난 아비 선조를 만나 왕의 기상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흑역사로 사라졌듯, 개화 개혁의 문을 열고자 했던 소현세자도 인조의 비비 꼬인 열등감의 재물이 된 것.
인조는 왕좌를 두고 선위에 대한 경계심이 두려움으로 바뀌며 아들을 심하게 견제해 온 터였다.
소현세자가 돌연사한 후 폐서인 된 세자빈마저 누명을 씌워 죽이고 잔인하게도 세손마저 내쳤던 인조다.
환경전 바로 옆 전각은 궁중 여인들이 머물던 경춘전이다.
인수대비를 비롯 인현왕후와 혜경궁 홍 씨 등이 사용한 이곳은 혜경궁이 22대 왕 정조를 낳은 장소이기도 하다.
궁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중궁전인 통명전.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건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건축물로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왕비의 거처인 통명전은 명칭도 특이한 무량각 지붕이다.
창덕궁 대조전도 마찬가지로 왕비의 처소 지붕은 장차 용이 될 새로운 용이 태어날 집이라 용마루를 얹지 않는다고.
이 통명전에서 예순여섯 살 영조가 열다섯 살 정순왕후를 맞았다 하니 피카소 급이고 요새 세상이라도 해외토픽 감 아닐까.
통명전 옆 영화당은 병자호란 당시 오랜만에 궁궐로 돌아온 인조가 거처하던 곳.
전화 극심했던 호란 통에 그나마 온전히 남은 건물이 영화당뿐이었다니 당시 참상 미루어 짐작이 된다.
영화당 동편에는 복을 모으는 집이란 의미의 집복헌은 후궁의 처소다.
여기서 영조의 후궁 영빈 이 씨는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정조의 후궁 수빈 박 씨가 순조를 낳았다.
집복헌과 붙어있는 영춘헌은 정조의 집무실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마흔아홉 나이에 눈을 감았다.
이렇듯 마치 부속건물 같지만 대비전 전각을 중심으로 배치된 여러 전각에서 왕들이 태어나고 눈을 감았다.
대왕대비의 침전이었던 경춘전은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산실청 역할도 했다고.
정조와 현종은 여기서 태어났다.
환경전은 왕의 침전으로 중종과 소현세자가 눈을 감은 장소도 여기다.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으로 쓰였으나 병자호란 후 인조의 거처로 바뀌었다.
이 내전에서야말로 무수한 궁중 비사가 엮여졌다.
여러 비빈과 숱한 궁녀와 어린 세손이 지내던 내밀한 공간인 창경궁.
영춘헌은 정조가 독서를 즐겼던 장소이자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 앞 궁중 뜰에 설치된 해시계가 눈길 끌었다.
어짊에 흠뻑 젖는다란 의미의 함인정은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 경연이나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었다.
시원하게 트인 함인정 내부 천장 쪽 사방 벽 위에 춘하추동을 읊은 네 개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 봄 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도다. 오호라~ 태평성대로다.
그날 때마침 문정전 뜰에서 궁중문화 축전 행사가 무대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 덕에 궁궐 문화해설사의 흥미진진한 역사 얘기 잠시 동안 경청했다.
눈이 나빠지도록 글과 친했던 왕, 사냥 즐기며 무에 빠졌던 왕, 지혜로웠던 또는 어리석었던 왕 등등.
내관인지 서생인지 차림을 한 봉사자가 관광객을 대상으로 넌센스 퀴즈를 내고 있었다.
세종대왕이 가장 좋아한 초콜릿은? 재빨리 손을 들고 가나초콜릿!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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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긋거리며 내전 거닐다가 만난 노거수, 18세기에 심어졌다는 향나무와 주목은 둘 다 시립 하듯 기우뚱 자세 기울었다.
들어서는 안 될 무서운 비밀이며 절대 봐선 안 될 못 볼 꼴 보면서 만고풍상 겪은 나무라서일까.
향나무나 주목 다운 늠름한 기상과 결기는 간데없고 비쩍 말라 초췌해서 차라리 안쓰러웠다.
기실 조선역사상 화려 찬란한 황금기는 두서너 임금이 만들었을 뿐 아닌가.
조선왕조가 내내 써 내린 파란만장한 궁중사 그렇고 그러하니 수목인들 그 모진 세월 보아내려면 오죽 심곡 뒤틀렸으랴.
저 건너로 영조가 스물일곱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친문 한 문정전 뜰이 다시 보였다.
난세요 말세란 소리 요즘 자주 들리지만, 이런 망측한 일이 당쟁의 와중엔 예사였다니 오호라!
뜹뜰한 창경궁의 비사는 창덕궁 후원 규장각 앞에 이르러 약간 희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