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꽃꽂이 교실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 자연 본래의 아름다움을 도심의 일상 가까이 청해 오는 작업인 꽃꽂이. 소재 자체가 지닌 조형미를 살려 자연을 재창조하는 성취감과 아울러 과감히 생략시키는 절제된 美는 강한 긴장감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선과 공간의 미적 구성은 하나의 창작이었고 그래서 꽃꽂이는 단순한 기교에서 예술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까웠다. 유한성의 극복은 감히 꿈도 꿀 수가 없으므로. 속절없이 시들어지면 그뿐, 수분 공급과 기타 방법으로 잠시 유보시킬 따름이지 붙들어 맬 수는 없는 목숨이다. 영속될 命의 끈을 잘라버린 채 즐겨야 하는 찰나의 만족. 그뿐이었다. 물기 거두며 지는 꽃은 老醜보다 더 초라하고 서글펐다. 한낱 쓰레기 되어 버려질 꽃의 종말. 그럼에도 사람들은 참으로 간교히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줄 안다. 물론 어느 꽃이나 피었다 지기는 매일반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회성 소모성은 아니다. 씨앗으로 혹은 뿌리로 다시 돌고 도는 윤희의 고리, 영원한 순환이 있는 것이다.
꽃꽂이에 대한 나의 환멸은 엉뚱한 데서 왔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어느 무인도의 동백 숲을 본 이후다. 기계충 흔적마냥 동백나무는 군데군데 밑동부터 잘려 나갔다. 이어지는 화면에는 밀밀한 원시림의 으름덩굴이 마구잡이로 끊긴 게 잡혔다. 손가락 한마디 만큼한 직경이라면 적잖은 연륜이다. 하긴 樹歲 오래된 가지일수록 곡선미가 좋아 선호하는 법. 꽃꽂이 소재로 도회에 간 그들은 몇 순간의 사치 끝에 한 생애의 막을 내린다. 전혀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항거의 몸짓 한번 못한 채로.
그와 비슷한 대상 없는 분노를 또 한차례 경험했다. 해운대 바로 옆, 미포 앞바다 매립 계획안이 나돌던 얼마 전. 공유 수면을 매립해서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다. 토지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주민의 소득 향상에 기여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그러나 무분별한 개발로 득 보다 실을 더 많이 경험한 우리가 아닌가. 몇 해 전에는 청사포 매립 계획이 발표됐었다. 시민들은 천혜의 경관을 지키고 청정 해역을 보호해야 한다고 즉각 들고일어났다. 따라서 반대 여론의 비등에 못 이겨 계획은 무산됐다.
미포 역시 마찬가지다. 빼어난 절경지 훼손은 물론이다. 거기다 해운대와 해안선이 잇닿은 미포 매립은 결국 해운대의 황폐화로 이어질 터다. 이미 백사장의 유실로 전전긍긍하는 해운대다. 만일 미포가 위락지로 바뀐다면 조류 따라 생활 오수는 해운대로 유입되고 자연히 해운대 해수욕장은 오염될 수밖에 없다. 환경영향평가는 항상 뒷전이고 무조건 관광 자원으로 돈이 된다 하면 메꾸고 까뒤집고 파헤친다. 그러고도 개발이란다. 명목은 늘 그럴듯하나 금방 드러나는 근시안적 단견이요 먼 안목은 무시된 졸속행정이다. 목전의 利에 눈 어두워 더 큰 것은 보이지 않는 걸까. 침묵 속에 마냥 너그러운 듯하지만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자연임은 왜 모르는지.
앞서보다 더 개탄스런 일이 지리산에서 생겼다. 요즘 들어 노고단 벽소령 등 차도 뚫느라 한창 바쁜 지리산. 불도저에 포클레인이 쉴 새 없이 허리며 등판을 깎아내고 있다. 고산지대 희귀 수림도 기암괴석도 무차별로 한데 깔아뭉갠다. 종단, 횡단의 도로 개설로 절경은 망가지고 만신창이가 돼가는 산. 정말 너무한다 싶다. 지리산의 아픔을 하마 잊었는가. 한 서린 고통을 벌써 잊었는가. 골짜기마다 피로 얼룩진 역사가 있었는가 하면 도벌꾼의 횡행으로 수난당한 지리산. 이제는 자연 훼손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자동차 공해에다 뭇 군중이 남긴 쓰레기로 중증의 병을 앓는 그 산이 아닌가.
지리산 자락에 연이 닿은 지방마다 관광객 유치 경쟁에 불이 붙었다. 군사작전 도로이건 산판 도로 이건 매끈하게 단장시켜 더 북적대는 차량에 더 흥청이는 인파를 불러들여야 한다. 산행도 근자엔 차와 더불어 인 시대. 땀 흘려 걷는 산행이 아닌 편안히 차에 실려 운반되는 산행이다. 모든 게 편리 위주로 힘든 건 질색이라 대충대충, 산행이 마치 다이제스트로 책 읽는 식이다. 높은 산도 간단히 쉽게 오르려 한다. 숲과 계곡에 감추어진 비경 따위는 관심 밖이고 다만 이름난 곳만 둘러보면 된다. 결과는 있고 과정은 없는 현대인의 성급함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주마간산 격의 산놀이 객으로, 대강 추려서 명소나 정상만 훑으면 그뿐. 더해서 새소리 나 바람의 느낌 따위는 허접스러운 감상론자의 몫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다. 자연은 나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듯, 일체의 사물을 인격화하고 거기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건만. 명산의 휴일 인파는 번번이 장터를 방불케 한다. 시정 네거리같이 신호등이 서야 하고 교통순경이 필요할 정도로 밀물이듯 몰려온다. 캠프장마다 지지직 야외 바비큐 타임. 고기 구워 먹고 마시며 놀다 가면 그뿐. 왕창 쓰레기 쌓아두고 뒤처리는 나 몰라라, 실종된 양심들이다. 남겨놓을 건 추억이건만 바위틈이며 물가에 쓰레기만 남겨져 결국 이에 더럽혀지는 건 계곡의 옥류다. 물질의 풍요에 발 못 맞추는 여가문화의 빈곤 내지는 놀이에 대한 개념의 저급성이랄까. 시민정신의 결여를 언제까지 탓해야 할지.
산은, 산을 진정 아끼고 좋아하는 이들이 오르는 곳으로 본디 그대로 그냥 잊은 듯 버려둘 수는 없을까. 산길은 조붓한 등산로가 제격이고 그로써 충분한 것. 오직 산은 푸른 나무숲과 맑은 물소리와 산짐승의 보금자리이길 희원한다. 푸른 자연을 지키자는 구호는 골이 깊어 그만 잦아들었는가. 고조되는 비판 여론은 산이 높아 안 닿는 건가. 꼬리를 문 차량 행렬에 한숨 쉬며 안장골 어느 주민이 하던 말, 산은 저 혼자 놔두었던 때가 젤로 행복했지요.
그렇듯 빈사 상태에 빠진 지리산 아니 우리 곁의 모든 자연. 4월 22일은 지구의 날로 정해졌고,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이다.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자는 목소리 드높은가 하면 심각한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를 우려한다. 이 시대가 처한 그 어떤 위기보다 더 큰 위협이 생태계 파괴라는 말에 수긍이 된다. 모든 생물은 다른 생물과의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유지되는 그 자연 질서가 깨어졌을 때 우리의 생존 역시 보장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69년 달에 첫 착륙했던 비행사가 귀환 중 지구를 보며 원더풀! 외쳤던 당시. 푸른 지구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83년 챌린저에서 돌아온 우주 비행사는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공해로 희뿌옇게 죽어가는 지구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우리 모두가 자각해야 할 것은 깨끗한 자연 맑은 공기를 후손에게 남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함께 깨달아야 할 것은 환경오염은 바로 나의 문제라는 인식과 아울러 그 점 방만히 대처했다가는 자연의 보복이라는 부메랑이 돌아옴을 잊지 말 일이다. 역시 산은 저 혼자일 때가 아름답듯이 모든 자연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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