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의 다큐멘터리 책 <기적의 배>는 몰라도 한국인이라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에~' 노래는 알 것이다.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지나간 사실의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옛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 기억을 제대로 되살린다고 해도 당시의 그 아픈 기억들을 고스란히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피난민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유와 생명과 희망에 대한 갈구를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실제적인 상황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기적의 배 한국판을 옮긴이의 마무리 글이다.
12월의 얼음같이 찬 바닷물에 무작정 뛰어들어 남으로 향하는 수송선을 타려는 북녘 사람들, 왜? 왜? 왜?
북녘의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알몬드 장군 휘하의 미 10군단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12월 10일부터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해안에 미조리 함을 비롯한 미해군의 주력부대가 집결하여 흥남외곽을 둥글게 화망폭격, 흥남에 집결한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를 질서 있게 철수하도록 도왔다. 한국인 피난민들도 많이 몰려들었다. 동부전선에 들어가 있는 군인은 12만 정도였는데 이들과 함께 탱크, 대포, 장갑차, 차량, 화약 등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美해군기록에 의하면 이때 해군철수작전으로 철수한 군인수는 10만 5천 명, 화물은 탱크 1만 7천5백대, 포탄 등 군수물자 35만 톤, 그리고 민간인 9만 1천 명. 철수 군인에 거의 맞먹는 민간인 피난민을 실어날았다. 세계 군사 역사상 군인과 맞먹는 숫자의 민간인 피난민을 철수시킨 예는 없었다고.
저 숱한 사람들이 왜 고향을 뒤로한 채 남으로! 남으로! 떠나왔을까.
이처럼 1950년 12월 중순 연합군의 주축이 된 미 육군과 해병대는 장진호 포위를 돌파하고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던 흥남을 통하여 철수한다.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철수했고, 도시는 적의 포화에 의해 화염에 싸여 있었다. 다가오는 대포 사격과 공습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매시간 점점 탈출이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비행기용 제트 연료를 가득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해안에 남아 있던 14,000 명의 피난민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포화가 쏟아지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 배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현 뉴욕주 변호사)씨는 “선장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구출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라고 증언한다.
그와 함께, 살을 에이는 12월의 강추위 속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게 갑판과 화물칸에 들어찬 피난민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무언으로 증거 한다.
빅토리호에는 물이나 먹을 것, 화장실이나 의료진이나 통역관마저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적군의 기뢰를 뚫고 3일 만에 거제에 도착하기까지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5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생명의 기적"이 펼쳐졌다.
한국전쟁 후, 빅토리호 선장은 1954년 미국 뉴저지주의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에 들어간다. 그는 마리너스 수사로 일생을 봉헌하다가 2001년 10월 14일 선종하였다. 그를 포함한 47명 선원들은 세계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의 하나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분들이다.
흥남철수 당시 네드 앨몬드 미 육군 10군단 사령관의 부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은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흥남 해안으로부터 군 병력과 피난민 모두를, 즉 미국인들과, 적국인 북한의 많은 남녀노소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적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은 우리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특히 미 해군과 상선의 선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10만 명의 피난민이 구조를 요청하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고 그들을 안전하게 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당시. 어느 누구도 피난민들의 국적이나 정치 성향을 문제 삼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죄 없는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오직 구출해야 할 생명들이었을 뿐입니다. 피난민들을 탈출시키기로 한 결정의 현명함에 대해 나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인간생명의 문제라는 것이 저의 확신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불쌍한 사람들을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술회했다.
Meredith Victory라는 10만 톤급 유조선인 이 배는 당시 미군 비행기에 연료를 보급하기 위해 흥남에 들어갔다. 그러나 철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을 내려줄 필요가 없어 회항할 예정이었다.
12월 20일, 선장 Leonard P. Larue 씨는 바다에 뜬 배를 바라보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바라보면서 도무지 뱃머리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배는 유조선이어서 사람을 태울 수 없게 되어있고 사람을 태우면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어서 한동안 고민하다 마침내 작심했다. 저들을 구할 수 있는 데 까지 구하자.
선원 40여 명만이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 전부였고 유조선이기 때문에 화재위험도 높았다. 뱃머리를 차마 돌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그는 John Childs 대령의 도움을 받아 유조선에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피난민들을 태웠다. 물경 1만 4천 명이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배는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숫자이다.
1950년 12월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은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언제 기뢰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천만다행히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만원이라 12월 24일 밤(크리스마스이브) 거제에 도착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3백 톤의 화물선 위에서 모진 추위와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이 3일을 여행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거제항에 도착했다는 건 기적이다. 오히려 배 위에서 5명의 새 생명도 태어났다니 이는 하느님의 돌보심이 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은 이미 피난민들로 포화상태라 거제에 도착해 하선하기 위해 빅토리호에서 작은 어선으로 옮겨타 섬으로 들어오는 이 피난민들 행렬을 보라.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의 선한 이웃인 한국인들이 흥남 해안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며 탈출해야 했던 것은 여러 면에서 그 비극적인 전쟁 중에 일어난 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전 인류를 노예화하려는 결심으로 - 그 결심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 공산주의자들이 계획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시작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할지라도 최소한의 도덕성은 지켜져야 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악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국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으로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악한 세력에 맞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끈기를 주시고, 십계명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매일 기도합시다."
1960년 8월 24일 미국 정부 표창 수여식에서의 마리너스 수사 연설문 일부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팩트는 오류없는 사실이자 진실(truth)임을 현 국내외 정세로 미루어 알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