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대로였다.
하이 시에라 중에서도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다는 빙하지대.
12000~13000피트가 넘는 고도라는 건 수치 감각이 무딘 탓에 간과해 버렸다.
피트는커녕 한라산 1950 미터조차 감이 전혀 안 잡힐 정도로 숫자에 먹통인 나.
가마솥 불볕더위가 계속되던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사진에서 본, 빙하가 만든 옥과 터키석 중간쯤인 신비스런 물빛에 단박 혹해버렸다.
그 순간, 언제이고 꼭 가보리라 찜해둔 팰리세이드 빙하호다.
드디어 90도를 상회하는 날씨에 방문하게 된 빙하, 그것도 머나먼 해외가 아니다.
바로 캘리포니아 시에라 네바다 멀지 않은 두세 시간 거리의 이웃에 위치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인가.
옥빛 팰리세이드 빙하(palisasde Glacier)를 막무가내라 할 만큼 무작정 꼭 만나보고 싶었다.
빙하가 만든 호수를 직접 보고 싶었다.
오묘한 물빛은 화강암 쓸어내린 빙하 침전물이 쌓여 그만큼 독특한 색상을 보인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못 갈지언정 꿩 대신 닭이라도 어디냐.
Palisades Glacier는 북미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빙하다.
주변의 웅장한 산세로 경관 수려한 데다 장엄하기 그지없다지만.
허나 가볍게 나설 수 없는 10 마일이 넘는 쉽지 않은 코스란 것도 귓가로 흘려들었다.
빅 파인 크릭(Big Pine Creek)을 따라 오르다가 오른편으로 꺾어 들었다.
Big Pine Creek의 North Fork를 타자 그쪽 역시 고맙게도 기운차게 흐르는 계류 소리가 줄창 따랐다.
쌓인 눈 길게 흘러내리는 청푸른 설산이 건너다보이고 골짜기엔 연둣빛 메도우(Meadow)가 펼쳐져 있었다.
산행 초장인 그때까지만 해도 마냥 행복감에 도취되어 주절거렸다.
아암~ 어렵사리 고산을 등정하지 않고는 덕유산 설화도, 오대산 상고대도, 천왕봉 일출도 마주할 수 없었거늘.
그러다가 차츰 기운이 딸려 말을 잃어갔고 헉헉대며 가쁜 숨만 몰아쉬게 되었다.
지쳐 숨결 고르며 John Muir Wilderness 표지판에 기대어 사진 찍히는 순간도 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본격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데 벌써 휘청거리는 다리.
영화배우 론 체니 (Lon Chaney)가 돌로 만든 숲속의 오두막도 흘깃 스쳐 지났다.
트레일 헤드에서 두어 시간 지날 무렵부터 고산증이 오기 시작했다.
해발 8천쯤 되는 고지라고 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는 둘째치고 어찔 현기증마저 일었다.
유백색을 띤 옥빛이면서 터키석 색깔이 나는 호수가 눈에 삼삼해 힘들어도 이를 앙다물고 걸었다.
혹한의 시베리아 전선에서 반수면 상태로 행군하는 병사처럼 거의 무의식적으로 옮기는 발자국이었다.
오직 빛깔 기막힌 보석 같은 호수를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자기암시에 자기최면 걸며
억지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한계가 왔다.
완만한 경사라 녹록히 여겼던 바와는 달리 체력이 감내해 낼 수 없는 난코스였다.
마치 제자리걸음처럼 걷고 또 걸어도 저만치 드러난 푸른 암봉과의 거리는 조금치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고고~~ 생사람 잡겠네, 속으론 비명이 새어 나왔지만 겉으론 보무도 당당히 걸음을 옮겼으나 이미 흐트러진 균형감각.
전망 아름다운 호수고 뭐고 그쯤에서 단념하는 게 상책이었다.
속까지 울렁울렁, 메슥거려지자 그대로 널브러지기 전 깨끗이 백기 투항을 하기로 했다.
괜한 오기 부리다가는 자칫 민폐만 끼치게 될 터이므로.
충분한 산행 경험 없이는 무리한 코스라는 건, 빙하 흘러내리는 석벽을 마주 볼 때쯤에사 알아차렸다.
미묘한 옥빛 호수와 계류 폭포 져 흐르는 트레일을 걸어보고 싶다는, 일면 소박한 생각은 그러나 단순무식의 소치였다.
빙하 덮인 겹겹의 산봉우리와 침엽수 청청한 숲길이 끝도 없이 기다렸다.
다시 내려갈 길 계산을 해보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마침내 더는 못 가겠다며 풀밭에 누워버렸다.
여기서 기운 재충전하면서 기다릴 테니 다녀들 오라고 했다.
내 눈치만 보며 걷던 동행들은 자신감 완전 상실한 부담스러운 모습에 얼마나 곤혹감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다들 배낭을 벗어놓고 물가에 다리 뻗고 앉아 오늘 트레일은 여기까지! 편안하게 쉬다 내려가자며 머릿결 땀을 터는 리더.
썬더볼트 피크, 마운트 실(Mt. Sill), 스타라이트 피크, 노스 팰리세이드 등에서 흘러내려 형성된 빙하호라 어차피 피크까지 오르긴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버거운 코스라고 했다.
팰리세이드 빙하는 1만 4000피트급 봉우리들을 무려 다섯씩이나 빙 둘러 거느리고 있다하니까.
그간 몇 차례 탐방했던 곳이니 이쯤의 산행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며 아쉽지 않노라 말하는 배려심이 고마웠다.
오이 깎아 권하는 친구는 외려 내게, 억지로 무리하지 않고 적절한 결정을 해줘 고맙다고 위무했다.
내 정도면 넉히 오를 수 있다는 말만 듣고 용기인지 만용인지를 부린 자신.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하라, 를 거듭 숙고하게 한 엊그제 산행이었다. 2017
Trailhead : Big Pine, CA Hwy 395 North Big Pine Creek. Inyo National Fo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