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비 갠 유월 오후의 평온.
창가에 서니 맑고 투명해진 시야 건너로 아랫집 뜨락이 푸르게 안겨온다.
중후하니 기품 갖춘 정원까지는 아니지만
화목과 일년초가 어우러진 꽃밭이 아롱다롱 곱게 보인다.
가꾼 이의 정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알뜰살뜰한 꽃밭이다.
넓지 않은 터에 키 유념하고 색 안배시켜 자리 잡게 한 가지가지 여름 꽃들.
그 꽃밭에는 색색의 과꽃도 피었고 봉선화 옥잠화 채송화 깨꽃도 한창이다.
달리아 칸나는 한껏 붉디붉다.
거기에 무성하니 시원스러운 등덩굴이 담을 둘렀고
한 그루 우뚝 서서 푸른 그늘 드리운 건 목련일 게다.
홀연, 대구에 사는 영은이네가 떠올랐다.
지난 일요일.
창녕에 있는 길곡 저수지에서 영은이네 식구하고 즐긴 하루가 생각났다.
애들 아빠의 친구 가족인 그 집식구들하고는 일 년에 한두 차례
통도사나 부곡 같은 데서 만나곤 한다.
부산과 대구의 중간 지점쯤에서 약속을 하는 전례대로 이번에 택한 곳은 낚시터였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바지런한 영은이네가 먼저 와 있었다.
저수지 건너편,
키 큰 포풀러가 서있는 선록(鮮綠)의 언덕에 꽃인 양 수 놓인 빨갛고 노란 티셔츠.
마치 다섯 송이 활짝 핀 화사한 꽃 같았다.
확인하나 마나 영은이네 가족이 틀림없었다.
"어이 - 문환이가?"
"성수야, 위쪽 논둑길로 돌아온나!"
둥근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양팔 내저으며 인사 나누는
장년의 두 집 가장 모습이 보기에 듬직하다.
자동적으로 눈길에 흐뭇한 표정이 어렸으리라.
그 순간 꽃들이 움직였다.
우리를 마중하려 이쪽 향해 논둑길 따라 일렬로 오고 있는 영은이 자매들이었다.
몇 달 만의 해후에 아이들은 좀 서먹해하다가 금방 친해져
물길 손잡아 건네주는 언니가 되고 폴짝폴짝 뒤따르는 착한 동생으로 어울렸다.
그 모습은 천상 꽃밭을 연상시켰다.
"느이 집은 환한 꽃밭이구나."
대체로 매사 무덤덤한 남편도 어여쁜 딸내미들을 지켜보며 한마디 한다.
영은 아빠는 허허 웃으며 "그래, 내 재산이다." 맞받는다.
그리곤 세 딸 곱게 키워 시집 잘 보내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하니 어깨 휜다고 엄살을 부린다.
실제론 동창 중에도 크게 성공한 측에 속하는 영은이네인데,
그 살림 정도 갖고는 딸 셋 결혼시키려면 어림없겠더라는 것이다.
그 말에 뾰로통 눈 흘기는 영은이.
요즘은 사실 여성의 위상이 놀랍게 변한 세상을 살고 있다.
능력이나 역할보다는 단순히 사무실의 꽃으로 치부되던 직장여성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게 바뀐 지 이미 오래.
이제는 커리어 우먼이 사회 각층에서 활발히 활동함은 물론
정치 참여 나아가 수상이며 대통령이 등장하는 시대이다.
균등한 교육의 기회는 물론 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 역시 대등하게 열려 있다.
성 구분 없이 탁월한 실력만 있다면 어떤 전문직에든 진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딸에겐 가문을 잇는다거나 가계의 대물림에 있어 아직 권리가 인정되지 않을 뿐.
그 때문일까, 우리 맏이만 보면 주눅 든다고 농담 곧잘 진담이듯 하는 영은 아빠.
영은이네는 쪽 나란히 딸 셋이다.
딸내미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귀엽다.
상냥하고 애교스럽고 모두가 착한 딸들이다.
아들 몫으로 주신 딸이라서인지 똑똑하고 한결같이 재능이 넘친다.
거기에 우리 고명딸까지 합해 딸아이 넷이서 나풀대며 뛰노는 게 나비도 같고 꽃잎도 같다.
들판이며 물가에서 맘껏 즐거이 뛰놀면서 새처럼 지즐대는 아이들.
저수지 인근에는 두 집 식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통 편도 상그럽고 심심할 정도로 입질 안 하는 찌를 보면 알만 했다.
두 가장이 한나절 낚은 거라고는 애기 손 정도되는 붕어 두서넛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번잡과 소란 속에서 모처럼의 휴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만남의 장소로 낚시터를 정했지만
우리는 고기를 많이 잡는 것도, 월척을 낚는 것도 목적한 바가 아니었다.
대구와 부산으로 떨어져 사는 친구 가족끼리의 반가운 만남,
그리고 자연의 품에 안겨 온전히 하루를 즐기기 위함이니.
한가히 낚싯대 드리우고 지난 이야기 나누며 아이들 뛰노는 걸 바라보노라면
세상사 시름이나 쌓인 피로 말끔 씻긴다.
돌아올 무렵, 다래끼의 붕어들을 모두 놓아주었다.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날렵한 몸짓으로 물속 깊이 사라져 가는 붕어들에 손 흔드는 아이들.
잘 가~~ 또 올게!
푸르름 짙어지는 논배미에서 오랜만에 들려오는 뜸부기 소리를 들었다.
뜸뜸 뜸북~ 아이들은 입 모아 <오빠 생각>을 노래 불렀다.
몇 달 만에 가진 참 좋은 하루였던 그 일요일.
내려다보이는 아랫집 꽃밭 위로 영은이네 가족들이 하나씩 겹쳐진다.
하얀 얼굴의 영은이는 옥잠화다.
새침하면서도 오연한 태가 꼭, 푸른 잎 사이로 소롯이 핀 옥잠화를 닮았다.
날씬하니 아주 예쁜 세은이는 이국적인 칸나 꽃과 같다.
노래 부르며 무용까지 곁들이는 재롱스러운 상은이는 벙그러진 채송화다.
사업 한창 뻗는 영은 아빠가 등나무라면 목련은 정갈하니 살풋한 영은 엄마이리라.
아랫집 마당의 꽃은 꽃답게 어여쁘고 나무는 나무답게 울울한 가운데 빚어지는 조화.
그러나 영은이네는 비록 흔한 모과나 석류나무조차 없는 초본류 꽃뿐이지만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워 올리는 화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거기다 꽃마다 각각 개성 독특한 데다 재능이 넘친다.
충분히 아들 능가할 딸내미들이다.
신은 역시 두루 공평하신 분이셨다.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