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첫 만남. 첫눈. 첫사랑. 언제 들어도 감미롭고 신선한 처음이란 말. 순결한 설렘인가 하면 기대로 들뜨는 기쁨이기도 한 처음이란 단어. 첫 작품집을 엮고 난 감회도 그런 거였다. 내용이 물론 우선이겠지만 보다 깔끔한 장정에 알맞은 활자 등 신경 쏟느라 염천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 여름. 靜寂 깨기 위한 일종의 내란. 그런 치열함이 내재해 있었다는 게 스스로 놀라웠다.
여고시절, 둘레의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언제인가 내 책을 갖게 되면 <너와 그리고 나의 초상>이란 제목을 붙일 것이라고. 하도 오래 막연한 그 꿈에 취해 있었기에 책 이름조차 친근한 느낌이 든다. 곧잘 몽상에 빠지던 그 무렵 문학소녀 아닌 여학생이 몇이나 될까. 교내 문학 행사에 석류빛 노을이 어쩌니 하는 시를 낭송한 추억이나처럼 치기만만하던 그때. 책 이름을 정해두고 금방 책을 펴낼 듯 들떠있었지만 막연히 '책'이었을 뿐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게 시집인지 소설집인지조차 아스름하다. 다만 당시 전혜린 씨에 한창 경도돼 있을 적임은 확실하다. 책이 나오면 재스민을 선물하겠다던 Y란 친구. 고요히 미소만 보내던 S란 친구. 오늘 문득 생각난다.
知命의 길목쯤에서 수필집 한 권 마련하리라 한 욕심 황망히 끌어당겨 겁도 없이 책 준비에 들어갔다. 88 서울 올림픽 열기로 온 나라가 후끈 달았던 그해. 진달래 수줍던 봄에 시작한 작업이 오동나무 꽃 흐드러진 초하를 건너 뚝뚝 석류꽃 이우는 삼복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절체절명의 소명인 양 폭염 속에 줄줄이 땀 흘리며 교정 보러 다닐 적엔 무엇에 씐 짓거리만 같았다. 때 이른 그 결단은 어쩌면 유한 듯하면서도 내심 고집스러운 내 또 다른 면의 허황기가 부추겨 댄 객기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설쳐가며 복잡하게 얽혀 살 만큼 용기롭지도 못하면서 저지른 일인 셈이다.
막상 책 꾸러미를 인수받고는 실망을 함께 안기도 했지만 첫 시도인 만치 시행착오인들 왜 없으랴. 돌이켜 부질없는 시간 낭비만은 아니라는 자위감과 아울러 몇몇 페이지는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자괴지심도 없잖았으나 첫 작품집은 역시 아름다운 설렘. 제목 선택을 두고도 꽤나 뒤척였다. 옛적 마음에 접어 둔 제목도 떠올랐다. 그러다 내심 작정한 것이 <달빛 향기>. 그윽한 느낌이 괜찮은 것 같았으나 왠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고른 것이 <주렴을 반쯤 열고>였다. 그 제목을 가지고 S 스님을 찾아갔다. 표지화를 부탁드리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 여름을 떠올리면 샘물 넘쳐흐르는 청렬한 소리가 들린다. 솨아 먼 파도 소리 같은 솔바람이 느껴진다. 삼베 치마 서걱대는 듯한 댓잎 출렁임이 보인다. 상기도 눈에 선한 그 길. 허나 초행의 산길은 멀기만 했다. 한가로운 산촌 거느리고 탱자나무 생울타리 과수원도 지났다. 망초 무리 환상인 양 너울대는 묵정밭 지나 언덕 내려서니 싱그러운 녹음에 싸 안긴 조그만 암자. 축서암이었다.
나이 든 감나무가 심심한 듯 하늘 올려다보는 단출한 암자. 거기 대발 드리운 채 차향 묵향 더불어 학을 띄우는 스님. 수천수만의 청학이 깃 치는 소리에 방안 어느새 푸른 바람 가득 차던 곳. 비상하는 학 떼로 벽체마저 폭포 내리는 청산이 되던 곳. 축서암 묵빛은 어쩌면 산간에 그윽이 감도는 저녁 범종 소리에다 쓸쓸한 이내빛 굳어 잿빛 되고 종내는 묵빛 된 게 아닌가 싶다.
무한한 환희인가 하면 가없는 아픔이기도 한 藝苑에 들어 무애의 경지를 가꾸는 분. 가만 앉아 옛사람의 산수만을 답습하는 대신 즐겨 그리는 학을 찾아 가까이서 학의 춤 학의 생태까지를 마음에 담는다는 분. 땅에고 허공에고 흐르는 물에조차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그리던 圓相. 어떤 격에도 얽매임 없는 해탈의 대 자유는 그로부터 비롯됨이 아니었을까.
처음 스님을 대면하던 순간. 예술에 몰두하는 이가 더러 그러하듯 왠지 차갑고 까다로이 여겨지던 느낌. 그러나 자상스러운 법문으로 닫힌 마음 열어주고 베풂의 참뜻 그 진수를 몸소 보여주신 분. 평소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전각 하는 와중에도 가을이면 손수 콩 띄워 메주 만들어서 두루 보시한다는 부지런쟁이셨다. 절 주변 불모지 갈아 논 일군 뒤 모진 흉년에 한마을 구제했다는 옛 스님들 얘기가 절로 겹쳐졌다.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란 말이 시퍼러이 깨어나니 고개 절로 숙여졌다. 분명 수행과 교화의 방법에는 여러 갈래가 있을 터.
드넓은 창천 향해 나래 펼치려는 청학 한 마리 표지로 띄운 다음 발문 주시기로 한 K 박사님을 뵈러 갔다. 아스팔트 복사열로 후끈 달은 어느 오후. 구덕 체육관에서 버스 내려 동아대학교를 찾았다. 한창 짙푸른 산기슭에 그 대학은 있었고 매미 소리 영그는 녹음 그늘로 접어드니 곳곳에 눈에 뜨이던 현수막과 대자보. 현 사회가 처한 혼미는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그들과는 도무지 대화가 안 된다고 단호히 외면하며 극단의 구호마저 서슴지 않는 대학가. 통일로로 달리자! 붉은 글씨가 자극적인 대학은 내도록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뭇 고조된 밖의 열기와는 달리 대학원장이신 K 박사님 연구실은 담백하고도 조촐했다. 선풍기를 돌려주시는 배려에 난이 먼저 알고 사르르 나부꼈다. 조심스레 돌아본 방안엔 정면 창만 빼고는 가득 둘러선 서가에 책 빽빽했다. 책이 빚어내는 묵직한 書香이 바로 이런 건가. 아니면 높은 경륜과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沈香 같은 거였던가.
책이 나온 뒤 인사드리러 찾아뵐 때는 실상 민망스럽고 송구함으로 차일피일 미루기조차 했다. 박사님의 직함을 잘못 기재한 실수 때문이었다. 출판 과정의 오식일지라도 그런 결례가 어디 있으랴. 본문 교정이 끝난 뒤 보낸 글이라 거푸 살펴볼 겨를이 없었지만 어쨌든 나의 불찰. 수필가이시니까 응당 문학박사이려니 했던지 법학박사 대신 문학박사라 찍혀 나온 것. 책을 전해 드리며 정중히 사과드렸다. 그러나 박사님께선, 실은 문학박사가 퍽 돼보고 싶었는데 잘 된 일이라며 전전긍긍하던 나를 다독여 주셨다. 박사님은 평소 남의 잘못을 꼬집어 드러내는 경우도 없거니와 부정적인 단점 같은 걸 말씀하는 예가 없었다. 그분의 화제에 오르면 누구라도 칭찬거리뿐이고 장점만 빛났다.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해 주는 것 나아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그게 바로 방생이라고 들은 기억이 새롭던 그날. 어떤 삶이 진정 아름답고 풍부한 것인가 잠깐 되새기게 됐다. 나아가 겸손과 포용의 덕성에 대해서도.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