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 이른 시각인데도 방 안이 환했다.
동터오는 하늘에 구름 몇 점, 대기도 근래 없이 쾌청했다.
현관문을 열자 아침 기운 번져 불그레한 한라산 정상 백록담 표정 또렷이 드러났다.
갑작스레 동작이 빨라졌다.
기상조건 아주 좋은 날이니 배를 타기로 했다.
얼마 전 성산일출봉에서 건너다 보던 길쭘한 섬 우도에 들리리라 벼르던 차, 날씨가 제격이었다.
바삐 채비를 하는 중 도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심전심, 우리는 11시에 구 터미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구터미널, 9 터미널이 아니라 신시가지로 터미널이 옮겨가자 원래 터미널 자리 정거장 이름이 구(舊) 터미널이 됐다.
서귀포에서 성산항까지 버스로 근 한 시간 반이 걸리므로 그럭저럭 출발시각이 늦어졌다.
성산포에서 우도 하우목동항까지는 십오 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두시 무렵 겨우 우도에 닿았다.
돌아오는 마지막 배 시간은 다섯 시, 우도에서 우리에게 할애된 시간은 고작 세 시간이었다.
딱하게도 우리는 둘 다 계산에 약한 데다 자연히 숫자 개념이란 게 부족했다.
게다가 둘 다 밥을 늦게 먹어 식사시간은 근 한 시간여 걸린다.
뚝배기 뜨거운 굴국밥 먹으며 할랑하게 우도 원주민의 섬 생활담 듣노라 정신줄 놓쳐서다.
어릴 적 게와 고둥 잡던 재미진 얘기부터 이름난 우도땅콩 알이 작은 건 소금기 머금은 지질과 수질 때문이라는 이바구부터.
땅을 깊이 파 식수로 담수를 끌어올려도 해수 성분에 가깝다는 점은 희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섬 아래 해수가 흐른다면 물 위에 널빤지처럼 우도가 떠있다는 결론 아닌가.
농약 과다사용으로 인한 섬 주변 해양생태계의 황폐화 실태는 듣기만 해도 실로 섬뜩했다.
진종일 들어도 물리지 않을 이야기이나 그쯤에서 우리는 일어섰다.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걷기 좋아하고 잘 걷는 우리라 전기차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고 세월아~네월아~하면서 걸었다.
시나브로 마을 길 둘러보며 사진 찍는 도중에 산뜻하게 신축된 성당에도 들렀다.
헬레나씨가 삼 년 전에 성전 건축기금을 보탠 곳이라 더욱 감회 새로워 한참 머물렀다.
씽씽 내닫는 전기차와 자전거 행렬을 보면서 이런 데서라도 좋은 공기 마시며 좀 걷지, 괜한 오지랖조차 떨었다.
작은 섬으로 얕잡아 봤는데 남쪽 끝 우도봉을 목표 삼아 걷는 동안 도무지 입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해는 약간 기웃해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헬레나씨였다.
그때까지도 난 시간 따위 전혀 신경도 안 썼다.
아무래도 우도봉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배 시간 대기가 빠듯할 거 같아요.
전에 한번 다녀온 그녀라 대충 계산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여전히 여유만만, 그럼 숏컷으로 질러서 등대만 보고 오자구요.
우도봉 산책로 따라 오르노라면 마주 보이는 성산일출봉 정경이 그리 멋지다지만 포기해 버렸다.
그녀는 아무 대책 없이 철부지처럼 나대는 내가 오죽 한심하고 어이없었을까.
아무튼 중간중간 외국의 유명 등대 모형을 사진에 담기까지 했으니 참 답답했으리라.
쪼르르 다람쥐처럼 단숨에 계단 올라 우도 등대 앞에서 떡허니 인증샷도 한판씩 찍고 우리는 솔방울 구르듯 산을 내려왔다.
그 바람에 시간은 충분했으나 천진항이 있는 곳과는 반대편이라 차를 잡으려 했지만 오가는 교통편도 없어 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짐짓, 굼벵이처럼 굴러가도 배시간 대기 넉넉하다고 호기 부렸지만 실제는 빛의 속도로 내달았다.
그렇게 걸어가면서도 만개한 유채꽃밭에 홀려 사진 찍어대고 공중의 갈가마귀 군무도 찍고 또 돌담도 찍고....
천진항에 닿으니 성산포행 배가 접안돼 있기에 재빠르게 올라탔다.
타고보니 그 배는 4시 40분에 출발하는 페리였다.
하우목동이 아닌 천진항에서는 이 배가 마지막 배였다.
다섯 시 못 미쳐 성산포 항에 내렸는데 이쪽 섬에 닿은 것만으로도 집에 다 온 듯 마음이 푸근했다.
서귀포행 버스를 타자 금방 해는 기울었다.
길고도 짧은 그 하루, 아슬아슬 고생스러웠던 우도에서의 기행(奇行)을 반추하며 우리는 두루치기로 저녁 든든히 먹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