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무량화

이쯤의 연륜으로도 세상살이가 노상 좋을 수도, 매양 나쁠 리도 없다는 게 실감된다. 환희의 정점에 오르기도 하는 반면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다. 어느 한순간, 참담한 심리적 공황 상태에 이른 적이 있다. 본시 강심장도 아니고 담대한 편도 못 되는 위인이 심한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며 떤 얼마간. 입이 바싹 마르다 못해 단대 나도록 타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근자 들어 이유 없이 입안이 마르는 것을 자주 느낀다. 갈증도 아닌 것이, 가뭄에 논바닥 마르듯 입천장부터 메말라 온다. 은근히 신경 쓰이게 불편한 증세다.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약국에 가니, 당뇨나 치주염이 아니면 갱년기 증후군이라며 전용 치약을 내준다. 그 치약을 부지런히 사용했지만 신통한 효과는 얻지 못했다. 급기야 한방병원을 찾았다. 진단 결과 기질적으로 화가 많은 탓, 먼저 뜨거운 불기운을 다스려야 한다는 거였다.



소싯적, 재미 삼아 그 앞에 앉았을 때 사주 보는 이는 ‘화가 많으니 옷은 물론 소지품에도 붉은색은 되도록 피하라’고 일렀다. 오래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은 얘기가 다시금 상기됐다. 그 한마디가 심층 깊이 잠재의식으로 묻혀 있던 까닭이라기보다 원래부터 나는 푸른색 계열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눈에 띄게 화려란 붉은 색상은 나와 별로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부담은 물론 싫증을 덜 타는 쪽이 수수하고 무난한 푸른 계통이다. 하긴, 오행의 하나인 사주의 화와 한방에서 이르는 화의 뜻은 서로 결이 다르다. 다만 뜨겁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는 곧 열이다. 붉은 기운이고 에너지이고 힘이다. 불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흥분되어 거친 상태도 화요, 격한 감정이 이는 것도 화다. 고요한 수면을 휘저으면 흙탕물이 인다. 노여움도 비슷하게 인다. 이처럼 분하고 언짢은 기분일 때 흙탕물일 듯 화가 난다. 어떤 돌파구 없이는 진정이 어렵다. 물이 가라앉기를 그냥 기다리자니 화가 뭉쳐 울화가 된다. 답답한 가슴에 울컥 치미는 뜨거운 덩어리가 울화다. 울화를 시원히 풀지 못하고 속으로 끓이다 생긴 병을 가리켜 화병이라고 한다. 혼자 끙끙대다 병으로 끌고 갈 바엔 그릇 몇 개 깨지더라도 홧증을 푸는 게 낫다. 아니, 그에 앞서 화가 나면 우선 찬물부터 한 대접 들이키고 볼일이다. 불기운을 눅일 수 있는 것은 물이기도 하니까.



화택이자 화탕지옥으로 표현되는 이승 살이. 불길 솟을 소지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 기름바다에 도화선은 무수하다. 성냥 한 개비 보다 더 하찮은 불씨, 찰나의 스파크에도 확 이는 불꽃. 예기치 않은 화염에 휩싸일 적인들 왜 없을까. 간혹, 모진 자 옆에 있다 불벼락의 여진에 끄슬릴 수도 있다. 그뿐 아니다. 억울한 오래, 부당한 모욕을 당하는 경우에다 어처구니없는 배신, 악의에 찬 음해를 듣기도 한다. 옳지 못한 처사를 목전에서 본다거나 우연찮게 시비에 휘말려 폭풍 한가운데 들기도 한다. 성격이 급하면 화마와 마주칠 일이 더 잦기 마련이고.



도덕군자가 되어 잗다란 세사에 끄달리지 않는 의연한 경지의 수양 단계에 이르렀다면 또 모를까. 범부중생이야 하잘 것 없이 사소한 일에 목숨 건다. 나 역시 이 나이에도 자기 절제나 감정 조절이 쉽지 않다. 자주 화를 내지는 않지만 한 번씩 심하게 화나는 일을 겪는다. 씩 웃고 넘겨 버리면 그만인데, 그게 결국 이기는 길인데 어림도 없다. 고개 돌려 그 순간을 꿀꺽 참아 내거나, 대천 앞바다처럼 가슴 트여 너그러워지기란 왜 그리 힘든지. 다혈질도 아니건만 펄펄 끓어올라 시비곡절을 가리고 시시콜콜 선후를 따지려 든다. 그땐 영락없는 짚더미다. 화르르 타오르는 마른 가랑잎이다.



화가 나면 가슴이 격렬히 뛴다. 혈압이 오른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얼굴은 달아오른다. 들끓는 용암이다. 이글대는 용광로다. 폭발 직전의 열기만으로도 벌겋게 화상을 입는. 그래서 누군가는 화통 터지는 자리를 일부러 피한 뒤 마구 먹는다고 한다. 지치도록 쇼핑을 한다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떤다고도 한다. 직접 부딪쳐 완력이든 말싸움으로든 화가 풀릴 때까지 한바탕 난리를 피워야 속 시원하다는 이도 있다.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그렇다고 화가 완전히 풀리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화는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 화나는 순간엔 대부분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퍼붓는 악다구니에다 못할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게 된다. 독화살이 따로 없을 정도다. 사태가 갈수록 악화돼 걷잡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피차 상처투성이가 된다. 이래저래 추태를 보인 고약한 꼴이 되긴 잠시다.



화는 풀려하기보다는 삭히는 게 현명한 일이다. 아니 그보다 참을 수만 있다면야 묵묵히 참는 편이 낫다. 그도 안되면 화를 발산시키는 방법을 찾아볼 일이다. 화가 날 때, 진정 견디기 어렵게 화가 치솟을 때 나는 차라리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산으로 간다. 산행으로 땀 흘리면서, 가쁜 숨을 내쉬면서 여러 악감정의 찌꺼기를 함께 토해내는 것이다. 때론 허공에 소리쳐 띄워 버리기도 한다. 땅에 꼭꼭 묻듯 발걸음 다져가며 걷기도 한다. 그 사이, 날카로운 감정의 촉수가 수그러들고 격랑이 잠재워져 차츰 평상심으로 되돌려지는 하산길의 뒷맛은 꽤나 가뿐하다.



생래로 화가 많은 탓인가. 바르르 성을 내는 화뿐 아니라 가슴속 들끓는 화기 역시 만만찮다. 쉼 없이 지심 깊은 데서 불길이 타오른다. 뜨거운 열감과 열정의 핵, 불은 붉은 에너지다. 분출할 곳을 찾지 못해 울끈거리는 마그마. 속에 품은 용암 덩이는 철철 넘치는 힘을 주체 못 한다. 그 불기운 다스려 한편 글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열화여, 얼마든지 활활 타오르거라. 불꽃의 정수(精髓) 같은, 불속의 사리(舍利) 같은 글 한 편 건질 수 있다면.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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