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지던 외곽이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가 돼버려 주소지가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 2동 서성로 6-1이다.
인근 바짝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며 건물 새에 옹색하게 끼어있는 붉은 벽돌담 안의 개량 기와집.
우뚝 솟은 아파트 사이에 납작하게 눌려진 듯 보이나 정신만은 형형히 푸른 저항 시인의 고택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저항정신의 깃폭 드높이 펄럭였던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가로 형 이상정, 아우 이상백 이상오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일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잘 알려진 시인은 <백조> 동인으로 박종화 현진건 홍사용 나도향 등과 문학적 교감을 나눴다.
1926년 문장지에 발표한 대표작 <서러운 해조> 외에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이 있다.
시와 논저 제목에서도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그의 저항적 기백이 다분히 풍겨 나온다.
이상화 시인의 정신과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자리.
문간의 사랑채와 안채 두 동의 건물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데 ㅡ자형으로 지어진 안채 안방에서 시인은 눈을 감았다.
일제에 쫓기느라 집에 오는 날이 드물었다는데 그래도 다행히 집에서 수를 다했으니 향년 나이 42세였다.
도심 개발의 열풍이 불며 허물릴 위기에 처했을 때 대구 문화계 인사들과 시민들이 모금활동을 펼쳐 가까스로 보존될 수 있게 됐다는 시인의 고택.
동시에 이상화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자 유족과 뜻있는 문인들이 상화 시인과 관련된 여러 유물과 자료를 기증해 주었다.
이렇게 모여진 유품이 전시된 사랑채, 생전의 그가 담교장(談交莊)이라 스스로 이름 붙인 방이다.
그래서인가, 허세 부리거나 위세 떨지 않는 아주 조촐한 그 방에서 더없이 빛나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질박한 삶을 산 시인의 집이 거창하고 요란스럽다면 오히려 괴리감이 들 터.
시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든 고택에 굳이 무슨 장식이 필요하겠는가.
한 시인을 회고할 수 있는 육필 원고 한 점, 쓰던 붓 두 자루, 창가의 책상만 있으면 그만 아니랴.
일상의 체취가 묻어나는 채반과 밥상이 더불어 담박한 소품인 것을.
안목 있게 잘 가꾼 문화유산은 바로 이런 것이리.
문화도시 대구의 정책안목은 역시 급이 다르다.
이 시인은 훗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소설 <마당 깊은 집>은 김원일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너나없이 살기 고단했던 시기였다.
고향인 진영에서 열세 살 길남이네 네 식구는 대처인 대구로 올라왔다.
피난민의 애환 서린 삶을 그린, 더구나 아버지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 가계 책임지고 삯바느질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살던 소년.
가난한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코끝 아릿하게 만드는 소설로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단칸 셋방에 대여섯 식구가 비비대며 지낸 방은 협소하기 그지없고 마당 역시 아주 좁다랗다.
그 마당 한켠 우물에서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수를 하려면 얼마나 복잡했겠으며 변소 차례는 또 얼마나 기다려야 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열악한 환경이다.
그러나 신문팔이 소년 길남이네 가족을 비롯, 다섯 가구가 세 들어 살았던 마당 깊은 집은 엄연히 실제 배경지 맞다.
당시를 재구성해 놓은 집에는 김 작가의 문학 체험관과 작가의 방이 마련돼 있으며 전시실에는 작가 기증품들이 선을 보인다.
대구의 중심부인 종로, 약전골목, 중앙통, 교동시장 일대를 아우르는 장소인 대구 중구 약령 길 33-10에 위치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 따라 문학 투어도 이뤄지며 담벼락에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을 가족별로 그려 놓았다.
어느 집 울안에 무화과 열매 무성하게 매달려 목 빼고 바깥 구경 중이고, 사람들 드나드는 대문 기웃대며 무궁화꽃 환히 피어있다.
그때나 이때나 붐비는 종로통은 피난민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살기 알맞은 동네.
주변에 서문시장 남문시장 염매시장 등이 모리모리 붙어있어 일감이 흔할 터라 막 벌어먹기는 좋은 장소다.
우리가 대구에 살던 때까지도 염매시장은 떡골목으로 유명했으며 교동시장은 구제품이 유통되던 곳이었다.
마침 길을 잡고 보니 염매시장 쪽, 지금도 떡볶이 어묵 찌짐 김밥 등 즉석 먹거리가 즐비하다.
다들 입을 틀어막고 지내는 세월이라 별로 손님은 없지만 그래도 풍경만은 인정스럽고 훈훈했다.
계산성당을 향해 천천히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달려가는 길남이 모습이 환영이듯 얼핏 스쳤다.
이상화 고택과 김원일이 살았던 마당 깊은 집이 서로 이웃한 중구 계산동.
대구매일신문사 웅장한 사옥 건물과 키재기 하는 계산성당 첨탑은 여전히 드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