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개항과 철도 건설, 수도 사업 등에 시설투자한다는 명목으로 대한제국에 돈을 빌려줬다.
조선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강제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던 것.
명분 그럴싸한 차관 공세를 통해 일제는 대한 제국의 재정 목줄을 조여왔다.
정부는 원금만 해도 1천여 만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으며,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 또한 상당액에 달했다.
그대로 두면 해마다 고율의 이자가 가산되어 마침내 강토를 송두리째 일본에 빼앗길 판이었다.
결국 가만히 있다가는 2천만 민족은 그들의 노예가 돼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절박함에 드디어 거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거상 서상돈이 발의함으로써 불붙었다.
우리 민족의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을 실현하기 위해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서상돈 선생.
그분은 현 대구 시민회관 앞에서 사자후를 토해내, 전 국민으로 하여금 구국 운동에 동참하도록 이끈 민족 선각자였다.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그 빚으로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될 거라고 그분은 외쳤다.
2천만 동포가 석 달간 담배를 끊고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 씩 성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 원이 된다며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자신부터 800원의 거액을 내어놓자 참석자 모두가 동참하여 당일에만 2,000원이란 거금이 모아졌다.
이 소식은 대한매일신보 2월 21일 자에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라는 기사로 전국에 알려졌다.
그 결과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는 위로는 고종을 비롯하여 고급관료와 민족자본가를 비롯 모든 남녀노소에게 확산되었다.
마침내 전 국민의 25%가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운동의 파급효과는 바다를 건너 일본, 미주 등 해외 한인들에까지 전해져 이에 적극 동조했다.
부녀자들 역시 외채를 갚기 위해 아끼던 패물을 내놓으므로 소극적이던 여성들이 최초로 사회운동 주역이 된 케이스로 기록됐다.
안중근 의사 가족은 어머니와 며느리를 포함한 모든 식구가 외채 갚기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 외 도산 안창호, 단재 신채호, 이준 열사들이 솔선수범해 보상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용단체인 일진회가 내분을 조장, 국채 보상금을 횡령했다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날조하는 등 운동을 원천봉쇄시키려 했다.
그 일로 회계책임자가 구속되기도 했으나 무리하게 억지로 옭아맨 사건이라 끝내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이 운동은 일제의 간악한 탄압과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도중에 퇴조되긴 했지만 국권 회복을 위한 사회운동의 모범을 보여준 사례.
비록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민족적 결집에 의한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민족의 경제적인 자강 운동인 물산장려운동과 실력양성을 통한 각종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셈이다.
애국정신으로 결집된 국민의 힘은 해방 이후에도 국산품 애용운동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기록물은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25%의 국민이 동참, 각자 이름을 직접 수기록으로 남기고 참여한 기부운동이었다는 점이 크게 주목받았다.
또한 당시의 기록물이 유일무이하게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됐다.
국가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국민적 연대와 책임의식이 돋보이는 역사 기록물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자 외채로 시달리는 다른 피식민지국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Belt and Road Initiative)을 통해 야심 찬 프로젝트를 야금야금 실현시켜 나갈 때 그 사탕발림에 넘어간 나라들에게.
중국이 마수를 숨기고 펼친 국제적인 경제 협력 및 인프라 구축 사업이 일대일로다.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화하기에 앞서 행한 바로 그 작전이다.
이에 약체국인 서남아시아 국가와 동유럽 멀리는 아프리카 후진국에 이르기까지 야욕을 뻗친 중국이다.
이미 많은 부채를 진 스리랑카와 미얀마나 파키스탄의 경우, 경제적으로 중국에 예속되다시피 한 실정이다.
그나마 말레이시아는 신 식민주의의 낌새를 우려하여 진작에 중단하며 파토났고.
그러다 코로나의 창궐로 된서리를 맞게 된 일대일로.
사실 이란 이탈리아 독일 등이 이 신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코로나로 제일 먼저 크나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미국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중국 견제책으로 동력을 잃어 현재는 주춤한 상태.
일대일로의 마수에 걸렸던 나라들이 특별히 주목하게 된 우리의 국채보상운동이다.
현재 한국의 외채 규모는 6,834억 불로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민생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뿌리고 있는 정부.
꿀 빠는 달콤함에 취했다가 우리라고 중국의 야욕에 걸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으며 베네수엘라 꼴 안된다는 자신 있는지?
서상돈 선생 고택을 찾았다.
대구 근대 골목에 들어서자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서로 이웃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도시형 개량 한옥집으로, 당시 대구 재벌가 급 거상의 주택으로는 검소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대문 안쪽에 벽돌 담장을 쌓아 출입문을 낸 색다른 구조의 한옥집, 세 칸짜리 별채가 먼저 나섰다.
카탈로그 한 장 챙겨 들고 아무도 없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관리자 하나 지키지 않는 빈집은 마루문 방문 부엌문 모두 활짝 열어 놓은 채였다.
대청마루 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한일자 형태인 네 칸 구조 정갈한 안채.
안살림과 부엌간이 그대로 노출돼 한눈에 들어왔다.
앞면 세 칸의 사랑채도 문은 다 열려 있었으며 부호라기보다 선비 느낌이 나는 선생의 거주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물론 고택에 걸맞는 인테리어 소품에 불과한 먹감나무 사층장과 간결한 사방탁자며 단아한 서안 일지라도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과연 그 당시의 서상돈 선생이라면 이런 식의 치장을 할 분인가?싶어 혼자 생각만 분다워졌다.
선생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점원을 하다 보부상을 시작으로 해서 대구지역의 큰 자산가가 됐다.
그러나 흰쌀밥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이력은 간소한 집 규모에서도 고스란히 읽혔다.
그만한 재력이면 고대광실 짓고 호의호식하련만 근검절약해 모은 재산으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도와 애국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다.
형편이 어려운 소작농에게는 땅을 무상으로 빌려주었으며, 기근이 들면 창고를 털어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나눠줬다.
또한 기금을 교회와 학교에 아낌없이 후원한 천주교 평신도였다.
남산동 땅 1만여 평을 기증해 교구청과 신학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하였던가.
선생의 직계 후손으로는 서공석 신부와 고 서인석 신부, 서준석 수녀가 있다.
순교자 집안의 후손인 선생은 가난했던 18세 무렵, 당시 대구 천주교회 원로회장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게 됐다.
그때 큰 도움을 준 원로회장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외조부이고 그 외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도 힘을 합쳤다.
열과 성을 다해 일한 덕에 서른 다섯 즈음엔 거부가 되어 삼만석지기로 불리는 유력 경제인이 되었다.
선생은 점차 격심해지는 천주교 박해에 따른 고난을 목격한 뒤부터 근검절약하며 천주교 전교활동과 자선활동에 전념해 왔다.
또한 교육사업을 지원하면서 앞장서서 물심양면 운영을 도왔으며 신문과 교양서적을 발간하기 위한 대구광문사를 설립했다.
나아가 독립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권회복을 위한 시민운동을 펼쳐나갔다.
그의 역사의식을 통해 귀머거리와 소경의 귀와 눈이 열리고 혀가 풀렸다는 성경 구절에서 따온 '에파타!'를 오늘에 다시 소환한다.
시민들이여, 깨어나라! 구한말의 혼돈이 재연되고 있는 이즈음 특히 국민들의 대각성이 요구되는 난세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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