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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3. 2024

천사의 詩를 쓴 제제에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서점에서 책을 골라 들고 나오며 나는 표지 그림을 보고 언뜻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연상하였다.

그랬다.

어린 왕자는 별나라 여행을 하는 하늘의 맑은 영혼이라면 제제는 척박하고 가난한 이 땅에 태어난 어린 왕자였다.

고통과 슬픔 속에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살아가는 투명히 맑은 영혼을 가진 어린아이였다.



제제. 그는 놀랍도록 영리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여섯 살짜리 소년이다.

구슬이나 딱지치기를 잘하는 장난꾸러기인가 하면 아무에게도 배운 적 없이 혼자서 글자를 익힌 신동 같은 아이였다.

한편 동네방네 소문난 개구쟁이로 거의 날마다 매질을 당하며 사는 말썽쟁이였다.

그에게 어린 왕자의 장미꽃 이야기는 없다.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께 드릴 담배를 사기 위해 맨발인 채 무거운 구두통을 메고 길거리에 나서야 했다.

그날 저녁, 맛있게 담배를 피우시는 아빠를 보고 과일 샐러드조차 목이 메어 먹을 수 없었다는 제제.



그런 반면 마음속의 악마가 충동질하면 온갖 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빨래가 가득 널린 옆집의 빨랫줄을 끊는다든가, 성당에서 얻어온 촛덩이를 카지노 바닥에 미끄럽게 칠한다거나,

주은 검은색 스타킹에 실을 매어 뱀 소동을 부린다든가 하는 따위.

또는 아저씨가 누운 그물 침대 밑에다 신문지로 불을 붙인다거나, 심어 놓은 묘목을 뽑아내는 등등.

그러다 보니 이웃의 꾸지람은 물론 집안에선 매 맞기를 거르는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형의 싸움거리조차 도맡아 하느라고 실컷 얻어맞고 집에 와 야단맞는 것도 독차지였다.

그러나 제제, 나는 알아.



네가 말썽꾸러기에 개구쟁이였지만 얼마나 착한 아이였는지를.



크리스마스 날 거리에서 나눠 주는 장난감 선물을 받으려고 넌 동생 루이스를 업고 녹초가 되도록 걸어갔지.

그렇지만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기대 앞에 실망하던 제제.

하지만 훌쩍거리는 동생을 달래며 말했어.

"너는 왕이야, 왕이 길에서 울면 안 돼. 내가 어른이 되면 멋진 선물로 가득 찬 차를 사줄게" 약속하던 너였어.

아마 너만큼 우애 깊게 동생을 보살피고 아낀 아이도 드물 거야.

루이스는 하늘의 어떤 천사보다 더 예쁘다고 생각했던 너였어.

그러니 넌 언제나 동생을 잘 돌봐주며 재미있게 놀아 주었지.



글로리아 누나도 네겐 천사였고 세상을 가르쳐 준 형도, 아빠도, 다른 누나도 한결같이 다 좋아했어.

물론 엄마는 쓰라린 연민과 함께 너무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나중에 시인이 되면 엄마를 위한 시를 지어 드리려고 맘먹었지.

네가 늘 텅 빈 채로 있는 선생님의 꽃병을 채워주기 위해 남의 집 정원의 꽃을 꺾어와 선생님 마음을 아프게도 했지.

하지만 선생님은 보았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그때 선생님은 말했어.

"조그만 꿈을 네게 준 나는, 얼마나 크고 훌륭한 꿈을 네게서 받았는지 모른단다"라고 했어.

 

누나에게 악보 책을 얻어주려고 거리의 악사를 따라다니며 노래 부른 널 누가 망나니라고 욕하겠니.

아리오발도 아저씨가 역 꼭대기에서 널 보고 외쳤지.

"제제 너는 천사야―" 그건 솔직한 그의 진심이었어.

뿐만 아니야, 제제 너는 얼마나 고운 마음씨를 지녔는지 몰라.

점심시간에 과자를 사주시는 선생님께 "가끔은 저를 위해서 때로는 저보다 더 가난한 애를 위해서 조그만 꿈을 나눠 주세요."

너는 이렇게 부탁드렸지.

사람들은 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을 나누어 가져야 된다고 말하던 넌 분명 천사였어.



또한 너는 그럴 수없이 정직한 어린이였어.

동물원 놀이를 하며 매표소에 이르러 다섯 살까지 무료라는 말을 들었지.

이에 "그럼 어른 표 한 장 주세요"하며 오렌지 잎 두 장을 내밀었어.

그러던 너로부터 어른들은, 자신의 기만과 허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넌 이해와 타산을 앞세운 숫자 놀음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 퇴색해 버린 인간의 말 없는 약속, 그 아름다운 관계를 일깨워 주었지.

 

제제 나는 너의 친구들을 기억해, 너의 이웃들도 함께.

이사 갈 집을 못 찾을까 봐 걱정하며 집 주소를 가르쳐준 박쥐 루씨아노는 네겐 비행기였지.

낡고 오래된 나무로 만든 망아지 장난감 달빛. 그건 또 네가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던 거였니.

너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널 위해 노래 불러주던 마음속의 작은 새.

어느 날 예쁜 구름이 하늘을 지날 때 넌 그 새를 날려 보내 주었지.

"언제나 날 위해 노래 불렀듯 하느님이 데려다준 다른 아이에게도 역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렴"하면서.



단추에 실을 꿰어 케이블 카 놀이를 하던 너.

닭장의 늙은 닭은 사자와 표범이 되어 동생을 데리고 동물원 놀이도 했었지.

또한 네 소중한 친구 라임 오렌지나무인 밍깅뇨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었지.

바람 부는 날 밍깅뇨에 올라타고 사냥놀이를 할라치면 카우보이 바지에서 보안관의 은빛별이 번쩍였지.

그와 동시에 리벌버 권총소리가 바람을 가르곤 했지.

 

그 무엇보다 네게 행복을 안겨주었던 뽀르뚜가 아저씨.

이 책 첫머리의 헌정사와 마지막 고백에서 썼듯이, 네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임을 알려준 그분이었지.

온정의 의미와 아름다운 꿈과 인생의 따뜻함을 가르쳐주신 아저씨와의 우정은 정말 빛나는 거였어.

처음엔 자동차 뒤에 매달리는 놀이를 하다 그 아저씨로부터 아픔과 굴욕감만 뒤집어썼었지.

그러던 어느 날 유리조각에 심하게 발을 다쳐 기다시피 학교에 가던 널 발견한 아저씨가 병원에 데리고 갔지.

그때의 친절과 다정함에 감동하여 너는 그 아저씨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어.

둘만의 비밀스런 우정을 죽음으로 지키자고 했던 아저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나 역시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단다.

하물며 너의 슬픔이야 뭐라 표현하겠니.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동 속에 교실을 뛰쳐나온 너를 생각하면 나도 너처럼 아기 예수를 욕하고 싶을 지경이었어.

그 충격으로 사경을 헤맬 때 널 찾아온 이웃들.

특히 세실리아 선생님이 네 책가방과 꽃을 들고 문병 오셨을 때나 아리오발도 씨가 겨우겨우 집을 찾아와 한 말이 잊혀지지 않아.

"내 착한 천사는 결코 죽어선 안돼"하면서 아리오발도 씨가 소리치자 정말 내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더구나.

네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뽀르뚜가 아저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착한 아이가 되고자 노력했던 제제.

너로부터 그 아저씨마저 빼앗아간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어.

 

그러나 제제.

넌 네게 수없이 다가온 시련에 증오하고 반항하고 슬픔을 느꼈을지언정 너는 결코 삐뚤어지거나 절망해 쓰러지진 않았어.

회복기의 어느 날, 글로리아 누나가 환한 얼굴로 내민 조그만 한 송이 흰 꽃이 있었지.

아픔을 딛고 일어선 넌 드디어 밍깅뇨가 피운 꽃을 보게 되었어.

곧 열매를 맺게 될 밍깅뇨처럼 제제, 너도 어른이 되어 가겠지.

그것이 싫든 좋든…….

하지만 제제, 너는 천사의 시(詩)를 쓰는 여섯 살짜리 순백의 영혼으로 내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거야.

아름답게 아주 아름답게.

현대와 같은 첨단 물질주의 속에 인간 정신이 메마르고 황폐한 작금에 있어, 별빛처럼 맑던 너의 순수한 교류와 교감이야말로 어찌나 지순했던지.

그래서 더욱 파장 큰 울림으로 우리 가슴에 와 부딪히는지도 몰라.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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